사랑은 나이를 잊는다.―바다와 엽서의 시간 (1)

6장 ― 바다와 엽서의 시간 (1)

by 윈플즈

6장 ― 바다와 엽서의 시간 (1)

해가 뜨기 전, 해변 쪽 공기는 유리잔에 맺히는 물방울처럼 차가웠다. 수진은 숙소 창문을 열어 두 손을 내밀어 본다. 손등에 닿는 바람의 결이 어젯밤보다 얇다. 오늘은 기다림을 받는 날이 아니라, 찾으러 가는 날이다.
가방에는 어젯밤 책상 위에서 미리 준비한 것들이 들어 있다. 빈 엽서 여섯 장, 얇은 검정 펜 하나, 그리고 아이보리색 봉투. 봉투 안쪽에 적힌 단 한 줄— 바닷가에서 기다리겠다—는 이미 외워질 만큼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낯설게 심장을 두드린다.


“오늘은… 내가 먼저 간다.”


그녀가 작은 소리로 말했을 때, 그 말은 방 안을 한 바퀴 돌고 그녀의 어깨로 되돌아왔다. 어깨끈을 고쳐 매고 문을 나선다. 발끝이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가벼운 충격이 발목과 무릎을 지나 심장까지 튀어 오른다. 설렘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일부러 발걸음을 느리게 만든다.


수진은 마흔여덟. 교정 일을 오래 했다. 낮에는 오탈자를 잡고, 밤에는 문장의 숨을 고쳐 놓는다. 일의 리듬에 삶을 맞춘 지 오래라, 누군가를 맞추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다.


태석은 쉰. 건축사무소를 운영한다. 도면과 수치, 규격과 법규. 정답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버틴 시간만큼 그의 어깨는 굳고, 눈빛은 차분하다. 두 사람 모두 결혼은 하지 않았다. 미루다 보니, 어느새 중요한 선택들이 일의 가장자리에 쌓여 갔고, 돌아보니 빈자리는 뜻밖의 단단함이 되어 있었다.


그 단단함을 어젯밤 해변에서, 둘은 동시에 조금씩 풀었다. 모래 위에 쓴 “내일”과 “기다림”이라는 글자가 파도에 지워질 때,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알았다. 서로의 이름. 그리고 다음 날 같은 자리에서 다시 만나겠다는, 우연을 가장한 선택.


해변길로 내려가는 동안, 그녀는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한다. 약속한 시각보다 스무 분 이른 시간. 일부러 이르게 온다. 우연을 만들려면, 약간의 프리셋이 필요하다. 빈 엽서와 펜, 그리고—머뭇거림을 줄이는 법.


모래는 밤새 식었고, 수진의 발자국은 새것처럼 선명하게 박힌다. 등대 아래 벤치, 바위, 카페 봄비. 어젯밤 동선을 거꾸로 재봉하듯 더듬는다. 그녀는 먼저 카페 문을 살짝 열었다가, 아무도 없는 실내를 보고 조용히 닫는다. 우편함에는 누군가 남긴 엽서 한 장이 더 늘어나 있다. “오늘의 바다에 어제의 내가 도착했다.” 낯선 글씨. 그러나 방향은 같다.


등대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바람이 결을 바꾼다. 바위 옆에서 누군가가 일어선다. 회색 셔츠, 두 번 접은 소매, 햇빛에 선이 깊어진 얼굴. 태석이다.


“오늘은 제가 먼저예요.”
수진이 말한다. 숨이 조금 가쁘다.


태석은 입꼬리를 살짝 올린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어제 눈빛이 그랬거든요.”


말은 가볍지만, 그 안에는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는 방식이 묻어 있다. 기다려주길 바라지 않고 먼저 찾으러 나오는 법. 두 사람은 그것을 같은 나이대의 체온으로 이해한다.


해가 올라오고, 파도는 오전의 리듬을 만든다. 두 사람은 바위 근처, 발목에 물이 스칠 듯 말 듯한 경계에 서서 같은 방향을 본다.


“어제 말한 ‘한 문장’ 규칙, 오늘부터 제대로 해 보죠.”
수진이 가방에서 엽서를 꺼낸다.


“조건을 조금만 더 붙일게요. 첫째, 거짓말 금지. 둘째, 미사여구 줄이기. 셋째, 오늘의 문장은 오늘 밤까지만 유효.”


“정확하네요.”


태석이 웃는다. 직업병처럼 숫자를 세듯 손가락을 펴서 따라 한다.


“그럼 저도 하나. 넷째, 빠지면 이유를 적어 오기. ‘바빠서’ 같은 응답 불가.”


“다섯째, 서로의 일은 묻되, 해석은 서두르지 않기.”


수진이 덧붙인다.


“그리고… 여섯째, 오늘은 제가 먼저 적습니다.”


엽서 위에 펜촉이 가볍게 긁힌다.
“찾아가는 기다림이 더 깊다.”


태석은 엽서를 받아 한 번 읽고, 자신의 엽서에 천천히 적는다.
“늦은 시작은 더 오래 남는다.”


두 문장이 나란히 놓였을 때, 바람이 종이 사이를 스치며 얇은 소리를 만든다. 마치 새로운 파일을 저장할 때 나는, 짧고 확실한 딸깍.


“건축은 늘 답안지가 있어요.”
태석이 말한다.


“하중, 기준, 구조. 엇나가면 무너집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일에 더 느려졌죠. 틈이 무너질까 봐.”


“교정은 반대예요.”

수진이 응수한다.


“정답이 하나가 아니에요. 문장을 살리려면 숨을 살펴야 하죠. 그래서 사람에게도 숨을 듣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아요. 대신… 먼저 말을 꺼내는 건 늘 늦었죠.”


“오늘은 빠르네요.”


“오늘은 제가 만든 우연이니까요.”


둘은 서로 쳐다본다. 중년의 얼굴은 젊을 때보다 표정이 깊다. 무엇을 감추어서가 아니라, 무엇을 견뎠는지가 얼굴에 남기 때문이다. 그 깊이가,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주의 깊음으로 번역되는 나이.


하늘이 아주 얕게 흐려진다. 바람의 방향이 반 박자씩 흔들릴 때, 비 냄새가 먼저 온다.


“소나기 오겠어요.”


“그럼, 봄비로.”


둘은 거의 동시에 말하고, 동시에 웃는다. 어제와 같은 타이밍. 같은 리듬. 카페 문을 밀자 벨 소리가 맑게 흔들린다. 안쪽에서 주인이 고개를 든다. 사각 안경, 느긋한 동작, 유리잔을 닦는 손.


“어제 그 두 분이군요.”
주인이 미소를 건넨다.


“우편함, 어젯밤에 한 장 늘었습니다. 누군가 읽고, 누군가 두고 가고.”

카운터 옆 나무 우편함에는 엽서가 몇 장 더 누워 있다. 낯선 글씨들이 같은 장소를 가리키듯 누워 있다.


“오늘도 남기고 가죠.”
태석이 말한다.


“그리고—”
수진이 얼핏 창밖을 본다.


“창가 자리, 어제 우리가 앉았던 그쪽 말고, 오늘은 반대편에 앉을래요? 시야를 바꿔보죠. 우연을 바꾸려면 풍경을 먼저 바꾸는 게 빠르니까.”


주인은 커피 두 잔을 내오며 우편함 뒤에 적힌 손글씨를 가리킨다.
여기 남긴 문장은, 누군가의 내일이 됩니다.

수진은 손끝으로 그 문장을 더듬는다. 활자의 올이 가볍게 일어난다. 활자 사이로 그녀의 호흡이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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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시작된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피아노의 낮은 건반처럼 이어진다. 해안도로를 지나던 버스가 물길을 가르며 지나가고, 유리는 잠깐 흔들린다. 둘은 말수를 줄인다. 커피의 온도가 입술에 남고, 눈빛이 문장 대신 오간다.


“내일도—”
수진이 말문을 연다.


“제가 먼저 찾아볼게요. 오늘처럼, 아니 오늘보다 조금 더 일찍.”


“그럼 저는—”
태석이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더 천천히 걸어오겠습니다. 우연이 당신 쪽으로 기울도록.”


“좋네요. 기울어진 우연.”


비가 잦아든다. 그 얇은 사이에, 두 사람의 엽서 두 장이 우편함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간다. 찾아가는 기다림, 늦은 시작. 종이끼리 닿는 짧은 소리.


문을 나설 때, 주인이 조용히 덧붙인다.
“독서회가 오늘은 쉬어요. 대신, 등대가 더 오래 켜질 겁니다.”


해변으로 돌아온 둘은 등대 아래 벤치에 잠깐 선다. 어젯밤 벤치 위의 봉투는 사라져 있다. 누군가의 손에 닿은 것이다. 수진은 모서리가 둥근 새 봉투를 꺼내 빈 카드를 넣고, 바깥쪽에 한 줄을 적는다.


“오늘은 내가 만들었다.”


그녀가 봉투를 벤치 아래, 비를 덜 맞는 목재 틈에 끼워 넣는다. 파도는 도착했고, 곧 물러난다.


“내일 봐요.”


“내일, 먼저.”


둘은 같은 말이지만 다른 순서로 말하고, 다른 길로 걸어간다. 발자국의 간격이 점점 벌어진다. 그러나 간격의 방향은 해변과 평행하다. 나란히 다른 길. 중년의 걸음으로 가능한, 가장 가까운 평행.


셋째 날 아침, 해변의 색은 유리잔에 희석한 잉크처럼 옅었다. 수진은 숙소 문을 나서며 가방 속 엽서 묶음을 한 번 더 눌러 보았다. 오늘은 내가 먼저라는 전날의 문장이 손끝에서 다시 살아났다.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며 한 층마다 숨을 정리했다. 인연을 만들려면, 몸이 먼저 움직여야 했다.


등대 아래 벤치에는 새로 올려진 봉투가 하나 더 있었다. 바람을 막으려는 듯 조심스레 돌멩이가 덮여 있었다. 봉투 겉면에는 단지 한 줄—“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가 적혀 있었다. 글씨체는 낯설었지만, 말의 온기는 익숙했다. 누군가의 어제와 누군가의 오늘이, 이 벤치에서 얇게 포개졌다.


수진은 그 옆에 자신의 봉투를 더했다. 모서리를 바람이 한 번 흔들고 지나갔다. 그때 등에 느껴지는 시선. 돌아보면, 회색 셔츠 소매를 두 번 접은 태석이 모래 위에서 손을 흔들었다.


“오늘도 먼저.”


“네. 오늘도 제가 먼저예요.”


둘은 자연스레 같은 속도로 걸어 등대 그림자를 벗어났다. 파도는 어제와 비슷한 간격으로 밀려왔고, 발자국은 거의 겹치듯 이어졌다.


카페 봄비*의 창가. 유리 밖 비늘빛 위로 햇살이 드문드문 박혔다. 주인은 어제의 두 사람을 알아보고 빈 머그잔을 내밀었다. 우편함에는 다시 낯선 엽서가 한 장 늘어 있었다.


“그리움은 방향이고, 사랑은 속도다.”


“오늘의 문장, 누가 먼저죠?”
수진이 펜을 꺼내며 물었다.


“어제는 당신.”
태석이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은 제가 먼저.”


그는 잠시 창밖을 보다 엽서 위에 적었다.
“자리의 기억이 사람을 부른다.”


“건축의 언어네요.”


수진이 엷게 웃고, 자신의 엽서에도 한 줄을 더했다.
“말보다 먼저 오는 것은 발걸음이다.”

두 장의 종이가 우편함 앞에 나란히 놓였다. 종이끼리 가볍게 닿는 소리가 났다. 둘은 소리를 따라 눈을 마주쳤다. 짧은, 그러나 확실한 합의의 시간.


“도면엔 사람의 속도가 없죠.”
태석이 말했다.


“그래서 현장에 서면 늘 시간을 관찰합니다. 같은 길이라도 아침과 저녁의 속도가 다르거든요.”


“편집실도 그래요.”
수진이 대답했다.


“낮에는 문장이 숨을 짧게 쉬고, 밤에는 길게 쉬어요. 같은 문장인데, 다른 호흡이죠. 그래서 저는 한 문장을 두 번 읽는 편이에요. 낮의 호흡과 밤의 호흡으로.”


그들은 말수가 많지 않았다. 대신 직업의 언어가 서로의 말에 스며들었다. 수치와 규격이 숨에 닿고, 쉼표와 행갈이가 벽과 창을 통과했다. 서로의 세계가 말없이 접히는 느낌. 나이가 만들어 주는 조심스러움이, 동시에 부드러운 교차로가 되었다.


정오 무렵, 카페 문 소리가 크게 울렸다. 비를 막는 투명 우산들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창밖으로는 관광버스가 두 대 서 있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파도와 다른 리듬을 만들었다. 그때 휴대전화 진동이 수진의 가방 속에서 짧게 울렸다. 출판사 후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선배님, 해안 카페 봄비 맞으시죠? 2시 반에 인근 공공도서관 소규모 북토크 있어요. 작가 한 분 급 공석이라… 사회 가능하실까요?


수진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방금 전 쓴 문장—말보다 먼저 오는 것은 발걸음—이 자신의 마음을 약간 몰아세우는 기분이 들었다.


“일이죠?”
태석이 물었다. 목소리는 판단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네. 갑자기요. 두 시간 후.”


“가세요.”
그는 간단히 말했다. “대신 조건 하나. 오늘 저녁 해변에서, 당신이 먼저 고른 자리에 서 있을게요.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오늘은 제가 찾는 날인데.”


“그럼, 둘 다 찾는 걸로 하죠. 같은 자리, 다른 방향.”


그의 말은 가벼웠지만, 책임감이 실려 있었다. 둘 다 찾아가는 기다림.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북토크 장소로 서둘러 향하고 있을 때, 카페 문쪽에서 낮은 인사가 들렸다.


“대표님, 여기 계셨군요.”


수진은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태석에게 다가가 있었다. 단정한 네이비 재킷, 서류봉투. 그녀는 도면을 접은 큰 파일을 꺼내 카운터에 펼쳤다. 건축 클라이언트 같았다.


수진은 그대로 멈칫했다. 순간, 마음이 아주 얇게 흔들렸다. 일의 동료일 뿐. 그녀는 스스로에게 빠르게 메모하듯 말하고 카페를 나섰다. 하지만 얇은 흔들림은 남았다. 오해의 씨앗은, 언제나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았다.


도서관 북토크. 작은 강당에 의자가 스무 개. 회색 커튼 사이로 해가 한 줄기 스며들었다. 수진은 마이크 테스트를 하며 손바닥에 침착함을 그렸다. 작가는 단정한 말투로 자신의 책을 소개했다. 문장은 질서정연했고, 불필요한 수식이 없었다. 사회를 맡은 수진은 틈틈이 질문을 던졌다.


“언제, 어떤 문장 앞에서 멈추셨나요?”


“그 문장을 다음 장으로 옮기게 한 건 무엇이었나요?”


그녀가 늘 교정지 위에서 하던 일. 멈춤을 묻고, 이동을 묻는 일.


행사는 예정보다 십오 분 늦게 끝났다. 그녀는 곧장 해변으로 달렸다. 둘 다 찾는 걸로 하자. 태석의 말이 귀에서 반복되었다.


그 시각, 카페 봄비에서는 비슷한 밀도의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태석은 클라이언트와 도면을 검토했다. 공사 기간, 구조 계산, 유리 커튼월의 트러스 배치. 그는 몇 번이고 손가락으로 스케치를 고쳐 그렸다. 여자의 질문은 명확했고, 그의 답도 간결했다. 회의가 끝날 때쯤, 비는 거의 그치고 있었다.


“대표님.” 여자가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미팅은 서울에서 뵙죠.”


“네.”


“그리고… 개인적인 말인데요. 대표님, 요즘 표정이 좋아 보이세요.”


“그래요?”


그녀는 가볍게 웃고 우산을 들었다.


“좋은 저녁 보내세요.”


태석은 잠깐 창밖을 보았다. 등대 아래 벤치가 시야에 들어왔다.


해변에 먼저 도착한 쪽은 수진이었다. 그녀는 숨을 가다듬으며 벤치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오전에 올려두었던 봉투는 사라져 있었다. 대신, 벤치 밑목재 틈에서 하얀 종이 모서리가 아주 조금 보였다. 꺼내 보면 엽서 한 장. 앞면은 오래된 등대 사진, 뒷면에는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사람이 먼저 온다. 감정은 그다음에 따라온다.”


글씨체는 태석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내일을 위하여 남긴 말. 수진은 엽서를 벤치 위에 다시 올려 두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나는 먼저 가야지.”


그녀가 등대 방향으로 몇 걸음 옮겼을 때, 반대편에서 오는 걸음. 태석이었다. 둘 사이 거리는 파도 한 번이 오가기에 충분한 거리. 둘은 거의 동시에 멈춰 섰다.


“찾았습니다.”
태석이 먼저 말했다.


“저도요.”
수진이 미소를 얹었다.


그들은 잠깐 말없이 바다를 보았다. 바람이 옅어지고, 파도는 오후의 리듬을 만든다. 같은 자리였고, 서로 다른 방향에서 왔다. 약속은 지켜졌다. ‘둘 다 찾는다’는 말이 이렇게 단순하게 성립되다니, 둘은 스스로 놀라며 조금 더 가벼워졌다.


“아까… 카페에서.”
수진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함께 있던 분, 일하시는 분이죠?”


“네. 클라이언트입니다.”

태석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설계를 확정하기 직전이라, 이곳에서 빛의 방향을 같이 보자고 했어요. 같은 자리에 서지 않으면 각도가 서로 다르게 느껴지거든요.”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의 씨앗이 아주 조용히 흙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같은 자리에 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죠.”


“그래서 오늘 이 말을 준비했어요.”


태석이 엽서를 꺼냈다.
“오해는 다른 자리에서 자란다.”


수진은 자신의 엽서에 천천히 한 줄을 더했다.
“설명보다 믿음이 먼저 도착할 때가 있다.”


두 문장이 나란히 벤치 위에 놓였다. 파도가 한 번 올라왔다가, 종이 가장자리를 스치듯 물러갔다.


저녁 무렵, 둘은 카페로 돌아와 오늘의 두 장을 우편함에 넣었다. 우편함 안쪽에는 어제의 문장들이 질서 있게 기대어 서 있었다. 주인은 컵받침을 정리하며 미소를 보냈다.


“엽서가 요즘 부쩍 늘었네요.”


“바람이 방향을 바꿔서요.”


태석이 농담처럼 말하고, 주인은 가볍게 웃었다.


그때, 우편함에 있던 엽서 중 한 장이 보이지 않는 것을 수진이 먼저 알아챘다. 전날 밤 그들이 함께 읽었던 문장—“내일의 내가 이곳을 기억하게 해 주세요.”—가 없어져 있었다.


“누가 가져갔나 봐요.”
수진이 말했다.


“가끔 있습니다.”
주인이 답했다.


“여기는 남기는 곳이기도 하지만, 데려가는 곳이기도 해서요. 어떤 사람들에겐 문장이 하나의 부적처럼 필요하거든요.”


사라진 한 장. 둘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어딘가에서 작은 메모를 남겼다. 사라짐의 방향을 언젠가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바닷가의 엽서들은 한곳에만 머물지 않는 성질을 지닌 듯했다. 누군가의 주머니, 누군가의 책갈피, 누군가의 약속 속으로 이동하는 문장들.

해가 기울고, 카페 안 조명이 조금 더 따뜻해졌다. 사람들의 소음은 낮아졌고, 바깥의 파도는 멀어졌다. 둘은마지막으로 오늘의 한 줄을 더 나누었다.


“저는—”

수진이 말했다.


“오늘도 내일도, 아마 모레도, 먼저 찾으러 올 것 같아요. 오래 혼자였거든요. 그래서 기다림보다는 찾으러 가는 법이 몸에 익었어요.”


“그럼 저는—”
태석이 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보았다.


“속도를 맞추겠습니다. 당신의 발걸음이 너무 앞서가면, 제가 좀 더 빠르게. 당신이 지치면, 제가 좀 더 느리게.”


짧은 침묵. 카페 스피커에서 낮은 현악이 흘렀다. 둘의 숨이 같은 길이를 가진다. 중년의 고백은 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멀리 갔다.


밖으로 나오자 등대 불빛이 한 번 길게 돌았다. 바다는 묵묵히 제 리듬을 이어 갔다. 둘은 벤치 앞에서 잠시 섰다가 각자의 숙소로 향했다. 발자국은 또다시 나란히 벌어졌지만, 이번엔 그 간격이 어젯밤보다 조금 더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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