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나이를 잊는다.―바다와 엽서의 시간 (2)

6장 ― 바다와 엽서의 시간 (2)

by 윈플즈

6장 ― 바다와 엽서의 시간 (2)

넷째 날 아침, 해변은 뿌연 안개로 덮여 있었다. 파도 소리는 들리지만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수진은 평소보다 더 일찍 숙소 문을 나섰다. 오늘도 내가 먼저, 마음속에서 되뇌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등대 아래 벤치에 도착했을 때, 어제와 달리 태석의 모습은 없었다.
벤치 위에는 봉투 대신 작은 종잇조각 하나가 돌멩이에 눌려 있었다.


“빠졌습니다. 이유는 오늘 저녁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글씨는 급히 적은 듯 삐뚤빼뚤했지만, 진심은 분명했다. 수진은 손가락으로 종이를 접으며 잠시 멈췄다. 규칙을 지켰다. 빠질 땐 이유를 남긴다. 그것만으로도,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수진은 혼자 앉아 엽서를 꺼냈다. 주인은 어제보다 더 느긋한 동작으로 커피를 내렸다.


“오늘은 혼자 오셨네요.”


“네, 사정이 있다고…”


“여기는 종종 혼자가 규칙이 되기도 합니다.”


우편함에는 새로운 엽서가 두 장 들어 있었다.


“사람을 잃지 않으려면, 자리를 먼저 지켜야 한다.”
“비우는 것도 방법이다.”


수진은 웃음 섞인 숨을 내쉬었다. 비우는 것도 방법. 오늘의 하루가 그런 의미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엽서에 한 줄을 적었다.


“빈자리는 기다림의 또 다른 이름이다.”


종이를 우편함에 넣을 때, 종이끼리 부딪히며 작은 마찰음이 났다. 오늘은 혼자였지만, 그 소리 덕분에 전혀 혼자가 아닌 듯했다.


저녁 무렵, 바람이 조금 잠잠해졌을 때 태석이 나타났다. 어제와 같은 회색 셔츠, 그러나 표정은 다소 지쳐 있었다.


“약속 지키러 왔습니다.”
그는 벤치에 앉으며 말했다.


“오늘은 일을 빼앗겼습니다. 새 건축주와의 협의가 예정보다 길어졌습니다. 이유는… 제 욕심이었습니다.”


수진은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건물의 방향을 조금만 틀면 빛이 다르게 들어오거든요. 그 차이를 설명하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결국 시간을 놓쳤습니다. 변명 대신, 이 말만 남기겠습니다.”


그는 엽서를 꺼내 적었다.


“늦은 이유는 욕심이었다. 그러나 욕심은 당신에게 닿고 싶어서였다.”


수진은 잠시 엷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자신의 엽서를 꺼내 썼다.


“이유를 말하는 사람은 이미 돌아온 사람이다.”


어둑해진 해변에서, 두 사람은 모래 위에 앉았다. 저 멀리서 기타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불안정한 코드였지만 바람과 파도에 섞여 오히려 음악이 되었다.


“가끔은, 제 일에서 벽돌과 창문보다 더 큰 게 사람이더군요.”
태석이 말했다.


“계산은 정확한데, 마음은 예측이 안 됩니다. 오늘이 그랬습니다.”


“저도 그래요.”
수진이 대답했다.


“교정할 때는 마침표 하나에도 집착하면서, 제 삶은 늘 미완성으로 남겨 두었죠. 그래서… 이렇게 설명을 들어주는 순간이 낯설지만, 고맙습니다.”


그녀는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그렸다. 감사. 파도가 밀려와 금세 지워졌지만, 태석은 이미 읽고 있었다.


카페로 돌아가 우편함을 열었을 때, 또다시 한 장의 엽서가 사라져 있었다. 이번엔 태석이 먼저 눈치챘다.


“어제도 한 장 없어졌죠?”


“네. 오늘도.”


“누군가 계속 가져가고 있는 겁니다.”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있습니다. 여행객일 수도 있고, 동네 주민일 수도 있고.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가져간 사람에게 필요한 문장이었을 겁니다.”


수진은 잠시 우편함 속을 바라보았다. 엽서들이 조금 헐거워진 틈 사이로, 공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사라진 자리가 불안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음 문장을 위한 빈칸 같아요.”


태석은 그 말을 받아 적듯 엽서에 한 줄을 더했다.
“사라짐은 새로운 자리를 준비한다.”


밤이 깊어가자 카페 불빛이 따뜻해졌다. 창밖 등대 불빛이 정해진 속도로 돌고 있었다.


“오늘은 제가 빠졌는데도… 당신은 자리를 지켰네요.”


“규칙이니까요. 빠질 수는 있어도, 빈자리는 기록해야죠.”


“그럼 내일은 제가 먼저 찾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저는 조금 늦게 걸어오겠습니다. 우연이 당신 쪽으로 기울게.”


둘은 웃었다. 빈자리를 인정하는 웃음, 다시 채울 수 있다는 믿음의 웃음.

해변을 떠나며, 수진은 마음속에 작은 메모를 남겼다. 오늘의 오해는 빈자리를 통해 지워졌다.
그리고, 사라진 엽서의 행방이 언젠가 또 다른 만남의 문을 열 것이라는 예감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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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날 아침, 해변은 유난히 거칠었다. 바람이 종일 불어 모래가 얇은 안개처럼 흩날렸다. 파도는 잦아들지 않고 연달아 해변을 두드렸다. 수진은 잠시 창가에 서서 고민했다. 오늘은 내가 먼저일까, 그가 먼저일까.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우연을 만들기로 한 이상,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가방에 엽서를 챙겨 넣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벤치에 다다랐을 때, 놀랍게도 태석이 먼저 와 있었다. 두 손을 바람에 대며 종이를 붙잡고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엽서를 누른 채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제가 먼저입니다.”


“역시 번갈아가며 인연을 만든 셈이네요.”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바람 속으로 날아가 파도에 흩어졌다.


카페 봄비에 들어서자, 주인이 바구니 하나를 꺼내 놓았다. 바람에 날아갈까 봐 무거운 책으로 눌러 두었다.


“엽서 중 하나가 돌아왔습니다.”


주인의 말에 두 사람은 눈길을 모았다.


어제 사라졌던 엽서였다. 앞면은 등대 사진, 뒷면의 문장 위에는 작은 덧글이 달려 있었다.


“이 문장이 제 하루를 살렸습니다. 다시 돌려드립니다.”


필체는 또 다른 사람이었다. 가져갔다가 돌려놓은 것. 사라진 엽서의 행방은 결국 누군가의 하루 속에서 살아 있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수진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우리가 쓰는 말이, 누군가의 내일을 잠깐 지켜 준 거네요.”


태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사라짐도, 돌아옴도 결국은 하나의 길인 것 같습니다.”


그날 저녁, 카페에서는 예정된 해변 독서회가 열렸다. 작은 스탠드 조명이 켜지고, 사람들은 창가에 둘러앉았다. 주인은 낡은 나무 의자를 더 가져왔다.


낭독이 시작되자, 어린아이부터 중년 부부까지 각자의 목소리로 문장을 읽어 나갔다. 파도 소리가 합주처럼 뒤섞였다.


사회자가 마지막 순서를 묻자, 태석이 손을 들었다. 그는 가방에서 엽서를 꺼내 한 줄을 또렷하게 읽었다.
“늦은 시작은 더 오래 남는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짧지만 무게 있는 울림. 이어서 수진도 조용히 일어섰다. 그녀는 자신의 엽서를 펴들고 한 문장을 낭독했다.
“찾아가는 기다림이 더 깊다.”


두 문장이 나란히 카페 안에 울려 퍼졌다. 바람과 파도가 순간 멈춘 듯, 모두의 숨이 같은 리듬으로 이어졌다.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창밖엔 등대 불빛이 한 바퀴 더 돌고 있었다. 남은 건 커피 향과 두 사람뿐이었다.


수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은… 서른 즈음에 한 번 혼인을 생각했어요. 하지만 교정 일을 포기할 수 없었죠. 책이 제 곁에 있어 달라고 붙잡는 것 같았거든요. 그 선택 덕에 지금까지 혼자였습니다.”


태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천천히 말했다.
“저도 마흔 즈음에 비슷한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건물 한 채가 제 이름으로 세워질 무렵, 그보다 중요한 게 없다고 착각했죠. 그 후로는, 일 외의 선택은 늘 뒤로 미뤄졌습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은 과거를 향했지만, 눈빛은 현재에 머물러 있었다. 일을 사랑한 만큼, 사람을 놓쳤던 시간. 그러나 지금, 그 놓침이 서로의 자리에서 만나고 있었다.


해변으로 다시 나왔을 때, 바람은 조금 잦아들었다. 별빛이 어슴푸레 바다 위에 반사되고 있었다. 벤치 위에는 낮에 돌려받은 엽서가 아직 놓여 있었다.


태석이 엽서를 손에 들고 수진을 바라보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만은 제 욕심을 말해도 될까요?”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저는 늘 늦었습니다. 건물에도, 사람에도. 하지만 이번에는 늦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도, 계속 찾으러 나오겠습니다.”


수진의 눈가에 파도빛이 반짝였다. 그녀는 한 장의 새 엽서를 꺼내 적었다.
“이제 기다림은 혼자가 아니다.”


그녀가 종이를 내밀자, 태석이 그것을 받아 오래 바라보았다. 고백은 소리보다 글자에 먼저 실렸지만, 두 사람의 침묵 속에서는 이미 충분히 전해지고 있었다.


등대 불빛이 다시 한 바퀴 돌았다. 파도는 일정한 속도로 밀려왔다. 두 사람은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손끝이 잠시 스치더니, 이내 자연스레 포개졌다.


짧은 말이 공기를 메웠다.


“우연이든 인연이든, 이제는 우리가 만든 거죠.”


“네. 늦었지만… 오래 갈 겁니다.”


바다는 대답 대신 같은 리듬을 반복했다. 발자국이 해변에 남았다가 곧 지워졌다. 그러나 오늘의 한 줄들은, 내일의 누군가에게 남아 있을 것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수진은 마음속으로 한 줄을 반복했다. 오늘은 내가 찾았고, 그는 내일을 약속했다.
태석 역시 창문 너머 바다를 보며 같은 생각을 했다. 늦은 시작이 더 오래 머문다.


두 사람은 여전히 중년이었다. 지나온 세월은 길었고, 앞으로의 날들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발걸음은 이제 평행이 아니라, 서서히 합류하는 선처럼 보였다.


해변의 바람은 또 다른 엽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에 쥐어질 내일의 문장.
그리고 두 사람은 알았다. 인연은 기다림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스스로 찾아 나서는 용기에서, 더 깊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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