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나이를 잊는다.―윤희의 이름 (1)

7장 ― 윤희의 이름 (1)

by 윈플즈

7장 ― 윤희의 이름 (1)

준호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났다. 윤희는 그 사이 매일 그가 보내준 번호를 들여다봤다. '내일, 같은 시간, 도서관 앞.' 그의 문자는 간결했지만, 그 뒤에 담긴 진심이 느껴졌다.


하지만 윤희는 선뜻 나가지 못했다. 핑계를 만들어가며 미뤘다. 딸의 옷을 정리해야 한다거나, 집안 청소를 해야 한다거나. 52세의 나이에 이런 설렘을 느끼는 자신이 어색했다.


그날 오후, 윤희는 결국 오래된 노트를 들고 집을 나섰다. '그냥 도서관에 책 읽으러 가는 거야.' 스스로에게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도서관 앞 벚나무는 이미 초록 잎이 무성해져 있었다. 봄이 여름으로 넘어가는 경계선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사흘 전 준호와 함께 썼던 문장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우리는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오늘의 빛으로 걸어간다."

"길이 어디로 나든, 오늘은 함께."


문장을 읽으며 윤희는 그날을 떠올렸다. 이상하게도 오랜만에 마음이 가벼웠던 시간이었다. 누군가와 진짜 대화를 나눈다는 기분.


"또 같은 자리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윤희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서 있었다. 병원 가운 대신 입은 회색 셔츠가 그를 더 부드러워 보이게 했다.


"아... 준호야."

윤희가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 혹시 나 기다렸던 거야?"


"아니, 그냥 점심시간에 들렀다가."

준호가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우연이야."


하지만 그의 손에 든 커피 두 잔이 그 말을 거짓말로 만들었다. 윤희는 그것을 알아챘지만 모른 척했다.


"고마워."

윤희가 커피를 받으며 작게 웃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두 사람은 잠시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서로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쉽게 꺼내지 못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

준호가 먼저 일상적인 화제를 꺼냈다.


"그냥... 비슷해. 딸이 방학이라 집에 있어서 좀 시끄럽고."


"대학생이지?"


"응. 이제 3학년이야. 취업 준비한다고 난리야."


"그렇구나. 아이들 키우는 것도 참 일이지."


준호의 목소리에 묘한 공감이 담겨 있었다. 윤희는 문득 그의 가정사가 궁금해졌지만, 직접 묻기는 어려웠다.


"너는... 병원 일 많이 바쁘지?"


"요즘 환자가 좀 늘어서. 그래도 점심시간만큼은 꼭 빼먹지 않으려고 해."


"여기 자주 와?"


"가끔... 마음이 복잡할 때."

준호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여기 오면 머리가 맑아져."


윤희는 그의 말에서 무언가를 느꼈지만,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서로의 속마음을 알아채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 그것이 이 나이의 예의 같았다.


"이 노트... 정말 오래됐네."

준호가 윤희의 노트를 보며 말했다.


"응. 학창시절부터 가지고 다녔어. 뭔가 쓰고 싶을 때마다."


"지금도 뭔가 쓰고 있어?"


"별거 아냐. 그냥... 생각나는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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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윤희가 말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이.


"저번에 우리가 쓴 문장 말이야."

윤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끔 읽어보는데... 참 좋더라."


"나도. '오늘의 빛으로 걸어간다'는 말이 계속 생각나."


"그치? 뭔가... 위로가 되는 것 같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는 말로 하지 않은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윤희야."

준호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


"너... 행복해?"

갑작스러운 질문에 윤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행복하냐는 질문.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가장 어려운 질문이었다.


"글쎄... 불행하지는 않아."

윤희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냥... 평범하게 살고 있지."


"평범함도 좋은 거야."


"너는?"


준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나도 비슷해. 그런데 가끔... 뭔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놓치고 있는 게 뭔데?"


"모르겠어. 그냥... 진짜 내 마음이랄까."


윤희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자신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할에만 매여 살다 보니,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잊어버린 것 같았다.


"나도 그런 생각해."

윤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은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서로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위로가 담겨 있었다.


"시간이 벌써..."

준호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병원 가야지?"


"응. 오후에 수술이 있어서."


"조심해서 가."


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윤희야... 다음에 또 만날까?"


"글쎄... 언제?"


"너 편한 시간에. 급하지 않으니까."


윤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후? 같은 시간에?"


"좋아."


준호가 가방을 들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


"나도."


준호가 도서관을 나간 후, 윤희는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감정을 느낀 게 언제였을까.


하지만 동시에 죄책감도 밀려왔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남편과 딸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윤희는 노트를 닫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다음 만남을 기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윤희는 준호가 건넨 커피 잔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못하고 계속 들고 있었다. 그 안에 남은 온기가 아직 따뜻했다.


집에 도착하자 딸이 거실에서 노트북을 하고 있었다.


"엄마, 어디 갔다 와?"


"도서관 갔다 왔어."


"또? 요즘 도서관 자주 가시네."


"할 일이 별로 없으니까."


딸은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고 다시 노트북에 집중했다. 윤희는 부엌으로 가서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평범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 평범함 속에 작은 비밀이 숨어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신만의 작은 설렘.


그날 밤 윤희는 잠자리에 들면서도 준호를 생각했다. 그의 따뜻한 눈빛, 진지한 목소리, 그리고 자신을 이해해 주는 마음.


'이게 사랑일까?'


윤희는 스스로에게 물어봤지만 답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마음이 다시 깨어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어 갈지, 아직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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