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 윤희의 이름 (2)
일주일이 지났다. 윤희는 그 사이 매일 시계를 보며 약속 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하기도 했다. 이런 마음이 커져가는 것이 옳은 일일까.
약속 당일, 윤희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거울을 보았다. 옷을 몇 번 갈아입고, 화장도 평소보다 신경 써서 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모습이 우스워 보여 웃음이 나왔다.
'이 나이에 뭐 하는 짓이야.'
하지만 마음은 이미 설레고 있었다.
도서관에 도착하니 준호가 이미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윤희가 다가가자 고개를 들었다.
"일찍 왔네."
윤희가 자연스럽게 말했다.
"응. 병원 일이 일찍 끝나서."
준호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어때? 좀 피곤해 보이는데."
"그래? 요즘 잠이 좀 안 와서."
"왜?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윤희는 그의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잠이 안 오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냥... 나이 들면서 그런가 봐."
준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가방에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
"이거... 너 줄려고 가져왔어."
"뭔데?"
"열어봐."
윤희가 봉투를 열자 작은 책갈피가 들어 있었다. 손으로 직접 만든 것 같았다. 하얀 종이에 연필로 그린 간단한 그림과 함께 한 줄의 글이 적혀 있었다.
"책 속에서 만난 문장들이 당신의 하루를 밝혀주길."
윤희의 가슴이 뜨겁게 뛰었다. 이런 선물을 받은 것이 언제였을까.
"고마워... 정말 예뻐."
윤희가 진심으로 말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네가 책 읽는 걸 좋아한다길래."
"언제 만들었어?"
"지난 주말에. 시간이 좀 남아서."
준호가 주말 시간을 내서 자신을 위해 책갈피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윤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나도... 너 줄 게 있어."
윤희가 가방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뭔데?"
"내가 좋아하는 문장들을 적어놨어. 가끔 읽어봐."
준호가 수첩을 받아 넘겨보니, 윤희의 정성스러운 글씨로 아름다운 문장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이거... 다 네가 직접 적은 거야?"
"응. 책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들 있으면 적어뒀어."
"고마워. 정말... 소중히 할게."
두 사람은 서로의 선물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말로 하지 않은 마음을 주고받는 순간이었다.
"윤희야."
준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응?"
"혹시... 시간 되면 밖에서 이야기할까? 날씨도 좋고."
윤희는 잠시 망설였다. 도서관 안에서 만나는 것과 밖으로 나가는 것은 다른 의미 같았다. 하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로 갈까?"
"근처에 작은 공원이 있어. 거기 걸어볼까?"
두 사람은 도서관을 나와 천천히 걸었다. 햇살이 따뜻했고, 길가의 나무들이 푸르렀다.
"이런 날씨에 병원 안에만 있기 아깝겠다."
윤희가 말했다.
"맞아. 그래서 점심시간마다 나오려고 해. 바람이라도 쐬면서."
"의사 일이 힘들지?"
"힘들기도 하지만... 보람도 있어. 아픈 사람들이 나아지는 걸 보면."
준호의 진심 어린 말에 윤희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공원에 도착하자 벤치에 앉았다. 주변에는 산책하는 사람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엄마들이 있었다. 평화로운 일상의 모습이었다.
"저 아이들 보니까 우리 딸 어릴 때 생각나."
윤희가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딸이 몇 살이지?"
"스물둘이야. 이제 다 컸지."
"그렇구나. 나도 아들 둘이 있는데, 하나는 고등학생, 하나는 중학생이야."
"아직 어리네. 손이 많이 가겠다."
"응. 특히 큰애가 요즘 사춘기라서..."
준호의 말이 끝나지 않은 채 멈췄다. 가족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현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윤희도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서로 가정이 있다는 현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준호야..."
윤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응?"
"우리... 이러고 있어도 괜찮을까?"
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겠어."
그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잘못된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니잖아. 그냥 친구로서 만나는 거지."
"친구..."
"그래. 서로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는 거야. 그런 관계도 있는 거 아니야?"
윤희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복잡했다. 정말 이것이 단순한 우정일까?
"그럼... 가끔 이렇게 만나는 걸로 하자."
윤희가 말했다.
"응. 서로 부담 주지 않는 선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약속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그 선을 넘나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기 시작했다. 때로는 도서관에서, 때로는 공원에서, 때로는 조용한 카페에서. 만날 때마다 서로에 대해 조금씩 더 알게 되었다.
준호는 어릴 때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윤희는 교사로 살면서 느꼈던 보람과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서로의 꿈과 좌절, 기쁨과 슬픔을 자연스럽게 나누었다.
어느 날, 비가 내리는 오후였다. 두 사람은 작은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창밖의 빗소리를 들었다.
"비 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게 있어."
윤희가 말했다.
"뭔데?"
"학창시절에... 비 오는 날 혼자 창가에 앉아서 책 읽던 기분."
"외롭지 않았어?"
"외로웠을 수도 있는데... 그때는 그게 좋았어. 나만의 시간이랄까."
"지금은 그런 시간이 없어?"
윤희는 잠시 생각했다.
"있긴 한데... 예전만큼 순수하지는 않은 것 같아. 뭔가 늘 신경 쓸 일들이 있거든."
"나도 마찬가지야. 예전엔 책 한 권 읽으면서도 완전히 빠져들 수 있었는데, 지금은 항상 다른 생각들이 끼어들어."
"그래도... 너랑 이야기할 때는 그런 기분이야. 학창시절처럼 순수하게 대화에 빠져드는."
준호는 그 말에 가슴이 뛰었다. 자신도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는 말로 하지 않은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비가 그칠 무렵, 준호가 말했다.
"윤희야... 나 고백할 게 있어."
윤희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뭔데?"
"사실... 너랑 만나는 시간이 일주일 중에서 제일 기다려져."
윤희는 그 말에 답하지 못했다. 자신도 똑같은 마음이었지만, 그것을 인정하기가 두려웠다.
"나도... 그런 것 같아."
윤희가 작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새로운 감정이 흘렀다. 더 이상 단순한 우정이라고 할 수 없는 무언가.
하지만 동시에 더 큰 죄책감도 밀려왔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들이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우리... 조심해야겠다."
윤희가 말했다.
"그래. 너무 깊이 빠지면 안 되겠어."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두 사람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윤희는 남편이 늦게 들어온 후 거실에서 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20년을 함께 살아온 사람인데, 언제부터 이렇게 멀어졌을까.
"여보, 뭐 힘든 일 있어?"
윤희가 다가가 물었다.
"응? 아니야. 그냥 피곤해서."
"요즘 자주 늦는 것 같은데."
"일이 좀 바빠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남편은 그렇게 말하며 맥주를 마저 마시고 방으로 들어갔다. 윤희는 혼자 거실에 앉아 복잡한 마음을 달래지 못했다.
한편 준호도 집에서 아내와 아이들과 저녁을 먹으며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아빠, 요즘 표정이 밝아졌네."
큰아들이 말했다.
"그래?"
"응. 뭔가 좋은 일 있나?"
준호는 당황했다. 자신의 변화가 겉으로 드러났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별일 없어. 그냥...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봐."
아내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준호는 마음이 불편했다. 가족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자신이 미안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복잡한 감정과 씨름했다. 서로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에 대한 미안함 사이에서.
다음 만남에서 두 사람은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지난번의 고백이 서로에게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요즘 어때?"
준호가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그냥... 비슷해."
윤희도 어딘지 어색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결국 그들은 서로 없이는 안 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윤희야."
준호가 헤어지기 전에 말했다.
"응?"
"우리... 이대로 계속 만나도 될까? 물론 지금처럼만."
윤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정말 조심하자."
"당연하지."
두 사람은 그렇게 약속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선을 넘나들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는 큰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녁 무렵, 윤희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준호가 준 책갈피를 들여다봤다.
"책 속에서 만난 문장들이 당신의 하루를 밝혀주길."
그 문장을 읽으며 윤희는 생각했다. 지금 자신의 하루를 밝혀주는 것은 책 속의 문장이 아니라, 준호와의 만남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옳은 일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감정이 단순히 지나갈 것만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올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날 밤 윤희의 노트에는 새로운 문장이 적혔다.
"사랑은 나이를 잊게 한다. 하지만 현실은 나이를 기억하게 한다."
작은 글씨로, 아무도 모르게, 자신만의 진실을 적어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