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나이를 잊는다.―교차된 길 위에서 (1)

8장 ― 교차된 길 위에서 (1)

by 윈플즈

8장 ― 교차된 길 위에서 (1)

도심의 대형 서점은 여름의 끝을 조금씩 비워내고 있었다. 입구를 지나면 차갑게 퍼지는 에어컨 바람 속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은 느려졌고, 신간 테이블마다 파란 파도가 인쇄된 여행책이 빽빽하게 눕혀 있었다. 누군가는 책을 들었다 내려놓고, 또 누군가는 휴가 계획을 속삭이며 웃었다. 2층 카페에서는 서로의 체온을 모아 작은 원을 이루듯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아이스 음료의 컵 벽면을 따라 맺힌 물방울이 미세한 비처럼 흘러내려, 테이블 위에 둥근 자국을 남겼다.


선미는 편집부에서 막 심부름을 마치고,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이곳으로 옮겼다. 도서관에서만 마주하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다른 공간에서 약속을 잡은 날. 그녀는 창가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유리창 너머의 도로는 파도처럼 흐르고 멈추고를 반복했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는 노을빛에 길게 끌렸다. 약속보다 십 분 먼저 도착한 건 언제나 그녀 쪽이었다. 기다림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었다.


가방 속에서 책을 꺼내려다, 오늘은 그냥 창밖을 보기로 했다. 활자를 좇는 눈보다는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와 건물 유리창에 비친 붉은 하늘이 더 솔직했다. 유리창을 스치는 바람은 도시의 소음을 얇게 깎아냈다. 테이블마다 오가는 대화는 국자에 걸린 국물처럼 희미하게만 번졌다.


“늦었나요?”


뒤에서 맑게 떨어지는 목소리. 선미가 고개를 돌리자 민호가 서 있었다. 평소 늘 단정했던 셔츠 대신, 오늘은 조금 더 편한 옷차림. 라이트 브라운 톤의 셔츠가 그의 얼굴 선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땀에 살짝 젖은 이마가,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어요.”


둘은 메뉴판을 넘기며 주문했다. 선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민호는 따뜻한 라떼. 서로의 기질처럼 온도가 달랐다. 얼음이 부딪히며 내는 투명한 소리와, 갓 내린 우윳빛 거품의 온도가 묘하게 대비되었다.


“요즘 일은 어떠세요?”

민호가 먼저 물었다.


“여름 특집호 막판이에요. 종이 마감이 가까워질수록 호흡도 짧아지죠.”

그녀가 짧게 웃으며 답했다.

“민호 씨는요?”


“휴가 시즌이라 공사 일정이 겹쳐요. 바다는 차갑고, 콘크리트는 뜨겁고요.”


평범한 근황처럼 흘렀지만, 대화 사이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묻어났다. 몇 달째 꾸준히 마주 앉았지만, 여전히 말하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그 침묵은 서로를 지켜주려는 예의였지만, 동시에 넘지 못하는 벽이기도 했다.

선미는 컵 받침을 손끝으로 천천히 돌렸다. 작은 원이 손끝에 쌓였다.


“민호 씨.”


“네.”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게 오래갈 수 있을까요?”


질문은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컵 안 얼음보다 깊었다. 민호는 대답 대신 잔을 들어 입술에 댔다. 라떼의 열이 입안을 지나 가슴에 닿을 때까지 잠시 시간을 두었다.


“가끔… 저도 생각해요.”

그가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애매한 자리에 서 있는 건 아닌가 하고. 그래도 지금까지는, 서로에게 무겁지 않은 방식이었잖아요.”


“그렇긴 한데….”

선미는 말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건 불안정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였다. 자꾸만 깊어져 가는 마음.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마음.


민호는 그녀의 망설임을 더 이상 건드리지 않았다. 대신 화제를 살짝 비틀었다.

“다음 주 토요일에 사진전이 있어요. 혹시 시간 되면… 같이 볼래요?”


“전시회요?”


선미는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흘렸다. 도서관에서 책을 사이에 두고 앉는 것과, 같은 프레임 안의 이미지를 함께 바라보는 건 전혀 다른 의미였다.


“부담되면 말고요.”


“아니에요.”

그녀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좋아요. 같이 가요.”


민호의 미소는 과하지 않았지만 오래 남았다. 얼음이 컵 벽을 한 번 고동치듯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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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도심 한복판의 작은 이탈리안 레스토랑. 낮은 조도의 조명이 테이블마다 둥근 섬을 만들고 있었다. 와인잔에 비친 불빛은 작은 별처럼 흔들렸다. 영미와 준호는 마주 앉아 있었다. 포크가 접시를 스치는 금속성 소리가 간헐적으로 공기를 갈랐다.


“맛있어?”

준호가 물었다.


“응. 처음 와보는 곳인데, 괜찮네.”


“괜히 긴장했어. 인터넷 평점은 믿을 수가 없어서.”


둘은 그 말에 동시에 웃었다. 동창회에서 다시 만나 몇 달. 조심스럽던 호칭은 어느새 부드러워졌고, 근황은 더 구체적이 되었다. 서로의 하루에서 쓸어 담아 건넬 수 있는 조각들이 늘어났다.


“요즘 너, 표정이 좀 달라.”

영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전보다… 훨씬 편해 보여.”

준호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누군가의 눈에 비친 자신이 더 이상 지친 얼굴이 아니라는 사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되받았다.

“너도. 더… 빛나.”


“이 나이에 무슨.”

영미는 고개를 저었지만, 귓불이 아주 조금 달아올랐다. 칭찬은 언제나 늦게 도착해도 늘 제 시간 같았다.


잠시 후, 영미가 숨을 고르듯 물었다.

“우리… 이렇게 계속 만나도 될까?”


둘 사이의 공기가 얇아졌다. 컵에 부딪히는 얼음 소리가 순간 크게 들렸다.


“모르겠어.”

준호가 정직하게 말했다.

“옳고 그름을 단어로 딱 나눌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게 잘 안 돼. 다만, 우리가 서로를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만나지는 않자. 그건 확신할 수 있어.”


그때 레스토랑 입구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두 자리, 괜찮을까요?”


고개를 돌린 영미의 시선이, 우아한 차림의 중년 여성과 단정한 정장을 입은 남자를 스쳤다. 윤희와… 준호였다.


서로의 이름이, 다른 테이블에서 동시에 불렸다.


“여기 앉자.”

남자가 의자를 빼주며 말했다.


“고마워.”

윤희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우연은 종종 소리로 먼저 도착한다. 가까운 테이블에서, 비슷한 대화가 램프 불빛 아래 동시에 피어났다.


“준호야, 너는 왜 의사가 됐어?”

윤희가 물었다.


“아픈 사람을 덜 아프게 하고 싶어서.”

남자가 답했다.


그 말은 파문처럼 번져 영미의 테이블 가장자리까지 닿았다.


“어? 아까 그 사람도 준호라고 했지?”

영미가 자신 앞의 준호를 바라봤다.


“정말? 세상 참 좁네.”

준호가 웃었다.


반대편에서도 같은 파장이 일었다.

“저쪽에서도 준호라는 이름이 들리네.”

윤희가 말했다.


“동명이인이겠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하나가 교차로의 신호등처럼 깜박였다. 네 사람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서로를 향했다. 먼저 말을 건 건 영미였다.


“혹시… 대화가 들렸다면, 죄송해요.”


“아니에요. 우연이 겹쳤네요.”

윤희가 받아주었다.


“저도 준호예요.”

영미 옆의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김준호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준호예요.”

윤희 맞은편의 남자가 답했다.


성이 갈라놓은 가느다란 선 위로 웃음이 건너갔다. 이름은 같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 그러나 오늘만큼은 같은 표정이었다.


두 준호는 금세 대화에 빠져들었다. 진료과 이야기, 야간 당직, 환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말, 그리고 스스로에게 가장 엄격해지는 시간들. 직업이 닮으면 말의 체온도 닮았다.


영미와 윤희도 자연스레 합류했다.


“저는 영미예요.”


“저는 윤희예요. 반갑습니다.”


잠시, 네 사람은 서로에게 작은 표식을 남겼다. 오늘 우리의 자리는 여기라고. 우연이 만든 둥근 테이블이, 조금씩 확장되는 듯했다.


시간이 흘러 접시는 비고 잔에는 마지막 한 모금만 남았다. 네 사람은 연락처를 교환했다. 형식 같았지만, 눈빛은 형식보다 앞서 있었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영미가 말했다.


“네. 오늘 같은 우연이라면, 한 번 더 괜찮을 것 같아요.”

윤희가 부드럽게 웃었다.


두 준호도 명함을 건네며 고개를 숙였다.


“시간 되실 때 병원에 놀러 오세요.”


“서로의 병원, 한번쯤 구경 가보죠.”


문을 나서는 네 사람의 등 뒤로 레스토랑 조명이 한 톤 낮아졌다.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면서도, 오늘의 대화는 한 줄씩 따라왔다. 우연이 만든 교차로에서, 각자의 길은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아 흘러갔다.


그날 밤, 네 사람은 각자의 집에서 짧은 문장을 남겼다.


영미의 일기장:
오늘, 같은 이름의 사람을 만났다.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윤희의 노트 구석:
인연은 때로 이름으로 먼저 온다.


김준호의 메시지 창:
같은 과, 같은 이름. 웃기지? 그런데 괜히 힘이 났어.


이준호의 가족 단체 채팅:
재밌는 우연. 세상은 넓고도 좁다.


서로 다른 집의 불빛 아래, 네 줄의 문장이 조용히 이어졌다. 교차된 길 위라는 제목이 그제야 의미를 드러내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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