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베를린 부부-chicken
27살에 서울의 어느 사무실에서 첫 직장생활을 할 때다. 지금 생각하면 27이라는 나이도 어리게 느껴지지만 무엇보다 대학을 졸업한지도 얼마 되지 않은, 학생의 때를 완전히 벗지 못한 시기였다. 대학 졸업반 내내 준비하던 유학도 무산되고 딱히 다른 차선책이 없던 상태로 일을 시작한 상태라 별로 그렇게 크게 열정이 있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사무실의 소장님을 학교에서 수업을 통해 알게 되어서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보다 '선생님과 제자'의 관계가 살짝 더 진하긴 했다. 그래서 식사를 하며 반주도 기울이고, 업무 외적인 이야기도 종종 했으며 둘이 외근을 나갈 때면 재미가 있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사원의 때를 조금씩 벗어나던 시점부터 업무량은 그보다 더 빠르게, 빛의 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침에 출근을 하면 저녁을 먹고 야식까지 먹은 뒤 막차를 타고 오는 생활을 반복하고 반복해도 일은 절대 줄지 않았다. 소장님의 펜이 회의 중 한 번 춤을 추면 모든 걸 순차적으로 바꿔야 하는 결정 과정의 문제도 있었지만, 막연하게 할 수 있다고 밀어붙이는 일에 대한 인식의 차이도 항상 많은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경기를 일으킬만한 문장들, '누가 야근을 시켰냐, 능력 되면 알아서 하고 가는 거지.' 등의 말을 들었어도 나도 꽤 순진했는지 그냥 그런가 보다 넘어가곤 했다. 그렇게 일에 일을 반복하니 사람들은 조금씩 예민해지기도 했고, 언쟁도 했으며, 감정적인 소모들도 나타나곤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몇 달을 넘기지 못하고 일을 그만두시는 분들도 꽤 많았다. 그렇게 아주 서서히 '번아웃'의 전조증상들이 사무실에서 가끔씩 훅훅 나타나곤 했지만, '번아웃'이란 고급진 심리 용어를 알 턱도 없는 나에게 사람이 그렇게 지칠 수도 있는 존재란 건 공돌이의 학문적 영역에 속하지 않은 미지의 이야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당시 나는 경기도 지역의 한 전원주택 프로젝트에 참여 중이었다. 물론, 프로젝트가 아주 초기 단계라 심도 있게 도면을 그리는 단계는 아니고, 3D와 모형 등등 전체적인 프로젝트의 방향을 정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던 시기였다.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촉박했고 사람은 없어서 나 혼자 모든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그 사무실이 살짝 절정기여서 일이 너무 많았다. 나 같은 초짜도 각자 일을 하나씩 맡아야 할 정도로, 그리고 그렇게 해도 해결 못하는 일이 많았다. 덕분에 나는 인격모독을 아주 즐기는 시행사의 '팀장'을 상대하는 것부터 도면, 이미지, 모형 등등 납품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오롯이 혼자 해야 하는 상황에 고립됐었다. 나는 누누이 소장님들에게 나 혼자 이 모든 일을 못한다고, 사람이 부족하다고 여러 번 했지만 소장님들은 몇 달째 조금만 기다려 보라며 시간만 미뤘다.
그날 저녁도 역시나 전 직원이 중국식당에서 어마어마한 세트 메뉴들을 시켜 먹고 다시 각자의 일들에 집중하던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내 옆을 지나던 소장님이 모형을 만들고 있던 내게,
"야 이래서 이거 어디 납품하겠냐? 이거 다시 만들어야 해."
라며 내가 만들고 있던 모형을 내팽개쳤다. 그리고 그 순간 난, 폭발했다.
"아니, 제가 도면도 그리고 이미지도 만들고 모형도 만들고. 제가 대체 이 일을 다 어떻게 합니까?!"
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러자 소장님도 화가 나셨는지 사무실 운영 십몇 년 만에 너 같은 놈은 처음이라며 불을 뿜기 시작하셨다. 결국 옆에 있던 다른 직원들이 우리 둘을 뜯어말리고 나와 학교 동기이자 회사 동기가 나를 화장실로 데려가며 상황은 일단락됐다. 그리고 그 화장실에서 난 너무 분해서 눈이 벌게졌다.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너무 분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는데 너무 한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 길로 바로 집으로 갔다.
그다음 날이 정말 곤욕이었다. 나도 분이 풀리지 않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래서 아무런 말도 행동도 취하지 않았고, 그건 소장님도 마찬가지였는지 아무런 말씀도, 행동도 없으셨다. 그러나 여전히 납품은 해야 했고 시간은 촉박했다. 그날 뒤로도 열정 야근은 계속됐고 기억이 나지 않을 때까지 일을 했다.
아마 그 해 연말 송년회 정도쯤에 겨우 말이나 튼 것 같다. 그 뒤로도 이상하게 정확한 사과는 어느 누구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렇게 하자라고 서로 짠 듯이 우리 둘 다 그냥 잊는 쪽으로 선택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그 기억은 생채기가 되고 흉터가 되어 아직도 난 그날 일을 떠올리면 분노가 먼저 내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날 밤, 과연 누가 잘못을 한 걸까. 아님 그 상황이 잘못된 걸까. 그 뒤로도, 퇴직한 후에도, 내가 한국을 떠나온 뒤에 한국에 갈 때에도, 학교 선후배에, 그 사무실에서 알던 분들에, 여러 모로 그 소장님과의 관계는 복합적이어서 만날 기회가 많았다. 그리고 시간이 가며 애써 그 날의 기억이 지워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도 이렇게 분노가 생생히 떠오르는 걸 보니 뭔가 확실히 그 날의 기억들이 제대로 정리가 안 된 모양이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준다는 말이 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며 가물가물해지는 기억과 함께 감정도 무뎌지고 확실한 것들이 조금씩 줄어들며 그냥 그렇게 '잊어 가는' 건 느껴봤다. 거기에 더 이상 파고들어 잊지 않으려 노력하지 않는 이상 모든 건 아련하게 저 멀리로 떠내려 간다.
불행하게도 좋지 않았던 감정들이, 후련하지 못했던 기억들이, 화가 났었던 순간들이 더 오래간다. 그리고 더 강하게 각인되어 손발이 오그라들어 없어져도 기억은 남는다. 특히, 누군가에게 그렇게 상처 받은 기억,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기억의 생채기들은 놀랍도록 더 오래간다. 아마도 세상 어딘가에 누군가가 내가 그 날 저녁 소장님에게 받은 기억만큼이나 나와의 어떤 기억에 치를 떨어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생채기의 톱니바퀴를 따라 돌고 돌다 보면 사과하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인지를 알게 된다. 내가 누군가에게 사과하는 것이 어려웠던 만큼 그분도 그럴 것이다. 인간관계의 후시딘이 있다면, 내가 먼저 열심히 써보고 그 소장님께도 권해보고 싶다. 내가 먼저 열심히 써서 소장님보다 더 독하게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싶다. 그래서 소장님도 후시딘 열심히 쓰시고 나에게 사과하시라고. 나도 그렇게 열심히 사과했다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