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있는 여유

by 베를린 부부-chicken

by 베를린부부

바르셀로나의 사무실에서 일할 때였다. 그 사무실에서 일하기 시작한 아주 초반, 나는 이탈리아 출신의 소장인 파브리치오와 일을 자주 같이 했다. 그는 스페인 출신의 소장인 알베르토와 다르게 3D와 이미지 작업에 굉장히 능숙했다. 일명 포토샵 장인이었다. 소장이 직접 포토샵을 다루는 젊은 사무실은 나도 처음이라 무언가 같이 일을 하는 듯한 느낌도 좋았고, 모르던 기능이나 정보를 공유하는 것도 좋았다. 그는 포토샵에서 몇 번의 클릭으로 멋진 이미지를 뽑아냈고 어떻게 보여줘야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는 항상 자신만의 트릭이라며 스스로 일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해줬었다. 매번 그렇게 전혀 몰랐던 놀라운 포토샵 기능에 대해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우와! 멋진데?!"라고 하면 그는 느끼하게 눈을 찡긋하며 "멋지지?"라고 답하곤 했다.

사실 그의 철학은 간단했다. 이 기능을 안다고, 다른 이보다 프로그램을 더 잘 다루는 것이 꼭 좋은 건축을 하는 것이나 좋은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 필수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일하는 사람이야 편하긴 하겠지만 언제까지나 도구이니 잘 쓰면 그만이라는 태도였다. 누구나 알지만 하기 귀찮아하는 , 누구나 해야 하는 것임을 알지만, 에이 그냥 적당히 하고 말지 뭐라고 생각하고 마는 것을 끝까지 하는 것이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일상에는 항상 그만의 ‘집요함’이 있었다. 무언가 파고들면 끝장을 보는 그 집요함. 대단한 집중력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어 뒤지고 뒤지면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찾지 못한 아이디어와 만나곤 하는지 그는 다른 사람이 생각조차 못한 생각들로 직원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내가 일하던 그때 그는 베니스 공대의 여름 워크숍에 강사진으로 초청된 적이 있었다. 그때 파브리치오는 두 명의 직원을 대동하고 갔었다. 3주 정도의 워크숍을 마치고 까무잡잡한 환한 얼굴로 다시 만난 직원들에게 워크숍 후기를 전해 들었다. 그가 마감을 앞두고 워크숍에 참여한 학생들을 모아놓고 투시도 강연을 했다는 것이다. 말인즉슨 한두 명의 학생에게 나에게 일러주듯 알려주다가 그게 소문이 났고 학생들이 돌아가며 너무 물어보는 바람에 아예 단체로 강의실을 빌려 칠판에 그려가며 ‘수업’ 비슷한 걸 했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일소점 투시도, 2점 투시도 등등 기본기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누구나 한 번쯤 배웠지만 쉽게 까먹은 내용들이다. 거기에 사진 등의 배경을 몬타지(Montage)하는 방법 등에 이야기했다 한다. 그의 마음은 ‘이런 얼마든지 알려줄 테니 시간을 아껴서 좋은 내용물을 만들어내라라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그의 이런 태도들이 멋지게 보였는지 이상하게도 이 당당함을 동경하게 되었다.


살면서 배운 어떤 것들은 특별히 다른 상황보다 더 많은 고생을 요한다. 그리고 그렇게 맨땅에 헤딩하듯 고생을 해서 습득을 하면, 남에게 쉽게 알려주기 아까울 때가 있다. 왠지 내 고생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리는 것 같아서이다.

대학 시절 설계 시간에 어떤 이는 설계 시간을 위해 준비한 모형을 다른 사람에게 꼭꼭 숨기는 사람도 있었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누가 훔쳐갈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그런 환경에 파브리치오 같은 선생님이 한 분 있었다면 그 수업을 들었던 우리 모두는 좀 생각을 달리할 수 있었을까.


학교에서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아서일지 모르겠다. 공부는 더해야 좋은 대학을 가고 그래서 좋은 직장에 가서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레퍼토리. ‘생존’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문명화 사회에 살아도 그 본질인 ‘싸움’의 성격과 분리되기 힘들다. 그래서 더욱더 생존을 위해 더 배워야 한다고 배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평생 동안 관성으로 작용하는 저 논리에 사로잡혀 사는지도 모르겠다. 생존이라는 그 싸움의 본질에 조금 더 의연하게 대처하고 싶다. 그게 경험으로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언젠가 파브리치오와 같은 그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럼 아마도 그와 같이 집요함이라는 무기를 먼저 장착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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