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베를린 부부-chicken
예전 마드리드에 있을 때 한글학교에서 교사로 잠깐 일한 적이 있었다. 무슨 문서 등으로 계약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었으니 사실 그냥 '알바'정도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아는 사람의 소개소개로 시작하게 됐는데, 마침내 앞에 그만두신 분이 제일 고학년인 중3을 맡으시다 그만두셔서 내가 그 반을 맡게 되었었다.
처음엔 사실 생활비가 궁해서 시작했었다. 당시 나는 뜻대로 풀리지 않던 취업에 고배를 마시던 중으로 한국의 부모님에게 받아쓰던 돈도 조금씩 바닥이 드러나던, 더 이상 돈을 받아 쓸 수 없는 상황이 눈 앞에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스스로 돈을 만들어 마드리드에서 더 버티던가, 아님 한국으로 가던가, 둘 중의 하나였다. 조금이라도 더 버텨야 한 번이라도 더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느다란 희망을 가지고 살던 나였으니, 당시 나에게 '한글학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필수였다.
수업은 3교시로 운영이 되었다. 국어, 한자, 국사 이렇게 3과목을 공부했었다. 토요일 오전에 수업을 했는데 수업에 가기 전 꽤나 일찍부터 나도 스스로 공부를 해야 했다. 배운 지 오래돼서 그런지 자세히, 오랫동안, 확신이 들 때까지 들여다봐야 했다. 인터넷으로 여기저기 수업 자료들을 찾고, 출력하고, 내용을 숙지하는 등 수업 준비에도 상당히 시간이 많이 들어갔다. 그렇게 한 주, 한 주, 한 달, 한 달 시간이 흐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몰입하게 되고 흥미도 찾고 빠져들게 되었다.
당시 나는 30살 무렵으로 중학 과정을 지나친 지 어느덧 14-15년 정도가 지난 상태였다. 그러니, 꼼꼼하게 교재들을 ‘공부’하듯 들여다봐야 했다. 이번에는 '나의 공부'를 위한 ‘나의 시점’이 아니라, 이걸 아이들에게 전달해줄 목적으로 공부를 해야 했다. 당시 나와 수업을 함께 하던 아이들은 모두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로 스페인어가 더 편한 아이들이었다. 그러니 한국에서 한국어로 학교를 다닌 아이들이 배우는 교재는 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순전히 선생의 재량으로 수업 내용을 선별해야 했다. 더군다나 수업 시간도 토요일에 한 과목당 90분 정도씩 진행되는 수업이니 시간도 촉박했다. 결국 아이들에게 좀 더 기억에 남을 만한 식으로 전달하기 위해, 마치 번역하듯 매번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리고 그건 확실히 시험을 보기 위해 공부했던 세대의 방식과 아주 다른 것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아이들과 교류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우리 반의 정원은 3명에서 5명 사이를 오갔다. 학기 중간에 다른 곳으로 가는 친구도 있었고 중간에 새로 오는 친구도 있었다. 수업이 토요일 오전이다 보니 축구 등 야외활동으로 오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집안일 등으로 부득이하게 빠져야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결국 주중에 각자의 학업생활을 하는 학생들에게는 약간 힘든 과정일 수 있었다. 여느 누구처럼, 주말엔 쉬고 싶으니까. 그리고 같은 과정을 두 번 듣는 친구들도 있었다. 한글학교의 마지막 과정이다 보니, 그리고 고등학교 과정이 없다 보니, 아쉬운 데로 한글과 더 자주 접촉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형제나 남매가 같이 다니는 경우 어차피 아이들 모두가 한글학교 과정을 마치지 않는 한 아이들은 부모님과 함께 한글학교에 와야 하니 온 김에 수업을 듣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교직원의 상당수가 학부모님들이셨다. 타지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한글과 한국 문화에 대해 알려주기 위한 노력으로 누구보다 더 열심히, 열정적으로 한글학교의 일원으로 일하신 분들이다. 그 중간중간에 나와 같은 유학생이나 취업준비생들이 있던 것이다. 학부모님들과 선생님들의 영향으로 학교의 전체적인 운영방법은 한국의 학교들과 닮은 구석들이 있었다. 스페인의 한 학교를 토요일에 빌려 쓰는 방식으로 운영이 됐는데, 낯선 스페인 학교를 배경으로 한국 교재를 쓰는 것도 어딘가 모르게 묘하게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다.
수업은 자연스럽게 교과서에 실린 한국의 풍경과 정서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많았다. 한 번은 교과서에 한국의 전형적인 교실의 풍경이 나왔었다. 아이들에게 어색한 그 풍경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내가 가진 추억들도 곁들이고, 아이들이 까르륵 웃기고 하고 했다. 그렇게 나의 추억이 굉장히 오래된 것처럼 느껴질 때마다 내가 진짜 아저씨가 됐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2년째 수업을 하던 그때, 바르셀로나 사무실에 취업이 되면서 마드리드를 떠나게 됐다. 고민 고민 끝에 선생님들과 상의를 해야 했다. 첫 출근은 새해에 맞춰 1월 2일부터 해야 했기에 이사는 12월에 해야 했으니 한국식으로 2학기가 끝나는 2월 말까지 2달 동안 남은 수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해야 했기 때문이다. 수소문 끝에 나 다음에 수업을 맡으실 선생님을 구하기는 했으나 학기 중에 선생님이 바뀌는 것이 별로 아이들에게 좋지 않을 거란 판단에 결국 2달 동안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를 주말 동안 오가기로 했다.
당시 그 직장이 정말 힘들게 구한 직장이라 행여 문제가 생길까 사무실에는 마드리드를 오가는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때 난, 지독하고 절박하게 그 직장에서 잘 보이고 싶어서 나의 모든 에너지를 그 직장에 쏟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금요일 저녁 근무가 끝나면 밤 11시 반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토요일 아침 7시 반에 마드리드에 도착하는 밤 버스를 타기 시작했다. 토요일 아침 일찍 터미널에 도착해 여유롭게 아침을 먹은 적도 있었고, 일주일 동안 계속되던 야근으로 피곤에 절어 벤치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고, 친한 선생님들을 아침 일찍부터 귀찮게 한 적도 많았다. 그렇게 토요일에 수업을 마친 뒤 오후 4-5시 차를 타면 바르셀로나에 밤 12-새벽 1시 사이에 도착했다. 그럼 내내 일요일까지 자다가 월요일에 출근을 했다. 그렇게 2달 여를 버스로 다녀가는 동안 나의 자잘한 행복은, 터미널에서 구입한 자잘한 군것질거리와 작은 핸드폰 화면으로 시청하던 무한도전이었다. (당시 ‘정총무가 쏜다’를 정말 재미있게 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지막 수업을 지나 마지막 졸업식을 할 때가 많이 생각난다. 취업준비가 장기화되며 자꾸 실패만 하는 나 자신이 좀 하찮게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가는 한글학교 수업이 나에겐 꽤나 큰 심적 도움이 됐다. 아이들과 만나 수업을 통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선생님들과 만나 교류하는 것도. 아이들이 나에게 고맙다고 했지만 난 도리어 아이들에게 더 고마웠다. 왠지 그 시간을 선물 받은 기분이 났기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