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베를린 부부-chicken
지난주, 근처 동네의 꽤나 큰 슈퍼마켓에 갔었다. 주말마다 일부러 큰 그곳으로 가곤 하는데 지난 주말은 조금 분위기가 달랐다. 주말이 되기 며칠 전부터 아내는 집 바로 앞에 있는 슈퍼의 특정 진열장에 물건들이 빈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난 주말이나 돼서야 직접 목격한 것이다. 파스타, 쌀, 계란 등 특정 품목들이 아주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통조림, 가공식품 등 정말 창고에나 채워 놓을 듯한 제품들이 약속이나 한 듯 진열장에서 비워져 있었다. 다들 만약 각자의 집에 스스로를 고립시켜야 할 상황에 대비하는 것 같았다. 그즈음 ‘사재기’라는 머릿속 깊이 저장되어 있던 말이 오랜만에 소환됐다.
베를린에 코로나가 조금 늦게 시작돼서 일까, 아님 사람들이 원래 좀 무딘 건가, 매일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사람들은 꽤나 차분하게 보인다. 물론 몇 주 사이에 못 보던 풍경들도 목격하곤 한다. 무언가를 옷이나 손에 칙칙 뿌리는 사람들, 두런두런 눈치를 보는 사람들 등등. 특히나 퇴근길에 북적이는 버스나 에스반에서는 탔다가 내리는 사람들도 보인다. 매일 뉴스로 접하는 한국의 분위기와 시각적으로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마스크를 쓰고 안 쓰고의 차이일 것이다. 3월 초에 우연히 목격한 두 명의 마스크를 쓴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마트의 빈 진열장을 통해 불안감이 느껴진다.
그 뒤로 베를린의 상황은 하루가 다르게 급박하게 바뀌고 있다. 화요일(3월 17일)에는 학교 및 유치원이 닫았다. 그 전 금요일부터 공문을 통해 전달됐다. 아이들이 집에 머문다는 얘기는 누군가 아이들을 봐야 한다는 이야기고 결국 아이들의 보호자들은 당장 일하는 시간에 영향받는 이야기다. 사무실에선 급하게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상황으로 재택근무를 먼저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을 선별했다. 아이를 혼자 돌봐야 하는 부모들과 임산부가 우선순위였다. 결국 우리 사무실도 부랴부랴 3월 18일 기점으로 대부분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매일매일 출퇴근을 하는 내가 아내는 내심 불안했던 모양이다. 하긴 요새 인종차별적인 상황이 많이 일어난 다는 흉흉한 이야기들은 인터넷을 넘어 현실까지 떠돌고 있다. 감염 걱정하랴, 돌발 상황 걱정하랴, 내심 이런저런 걱정하던 그녀도 나의 재택근무가 반가웠던 모양이다.
사상초유의 사태를 맞이한 사무실은 우왕좌왕이었다. 한국의 감염자가 치솟았던 2월 말의 어느 월요일,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동료들은 한국을 걱정했었다. 그날 전체 회의에서 처음 '코로나'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과연 독일에서도 대량 감염사태가 일어나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누군가 질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틀에 박힌, 정말 아무 데도 쓸데없는 교과서적인 말들을 교환했다. 그 뒤로 감염자가 조금씩 늘어가기 시작할 때도 한국사람이 제일 절박했다. 어느 누구도 제대로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을 모두 날리고 학교 및 유치원의 휴교령이 시작될 즈음에야 부랴부랴 재택근무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기술적으로 가능한 지부터, 어느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사태이기에 미주알고주알 많은 사견과 의견, 걱정과 염려들이 하루 종일 사무실을 돌아다녔다. 출근은 하되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마치 '술을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고전과 같다. 거기에 모두들 하루빨리 집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더 엉키게 만들었다. 확실히, 다급한 상황이 오고 서로 당황하게 되면, 보고 싶지 않은 모습까지 봐야 한다.
이젠 문 밖의 모든 세상이 조용해졌다. 정말 다들 집에 있는지 인터넷이 조금 느려지고, 먹통이 되는 경우가 생긴다. 한국인으로서 답답한 지경은 이미 넘어갔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다급해진 독일은 이동 제한까지 한다. 여러 가지 까다로운 경우의 수가 포함이 된 지침들이 하루가 다르게 발표된다. 여느 유럽 국가처럼 강제적으로 '감시'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제한'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이상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집에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수년 전 바르셀로나에서의 반 강제적 칩거가 떠올랐다. 그 유명한 스페인의 1달 여름휴가였다. 1달을 통째로 문을 닫아 버리는, 쿨하다 못해 무모해 보이는 공식적 휴가 동안, 어그러진 여행 계획에 눌려 집에만 있었던 적이 있다. 0에 수렴하려는 통장을 달래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들만 구입해, 지나간 한국 드라마를 정주행 하며 4주 동안을 집에만 있었다.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통장은 다시 살아났고 까맣던 피부도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살짝 하얗게 됐다.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다는 통장잔고의 압박에 의한 반 강제적 이동제한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마트에서의 예민한 반응들도 없었고, 불안한 눈빛으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훎어 보지도 않았고, 모든 것들을 의심하지 않아도 됐다. 단지 비어있는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는 나만 불안했을 뿐,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커피를 마시러 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주변이 나를 안심시켰다. 그래서 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는지 모른다.
지금 당장 이동을 제한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정말 이 사태가 끝난 뒤에 다시 출근을 하는 게 더 큰 문제다. 재택근무를 시작하기 하루 전, 아내와의 전화통화에서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거 마치 사무실 분위기가 배가 가라앉기 전 구명정을 타는 순서를 정하는 것 같다고. 왜 이렇게 되기 전, 조금이라도 더 세련되기 재택근무를 할 수는 없었을까. 그리고 조만간 사무실에서 다시 만나면 사람들은 예전과 같을까. 이번 사태로 인해 드러난 사람들의 민낯을 잊을 수 있을까. 여기에도 '인간관계의 후시딘'과 같은 연고가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