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겨버린 인연

by 베를린 부부-chicken

by 베를린부부

아마도 2003년이었나 보다. 복학한 뒤 처음 듣는 '건축 설계 수업'에서 후배 S를 만났다. 아득히 오래된 연도지만 아직도 그와의 첫 대면은 꽤나 선명하다. 나와 1살 터울인 듬직한 동생인 그는 든든한 덩치에 하늘색 폴로 남방을 말끔하게 입고 있었다. 그 후로 시간이 한참 더 흘러 그와 친해지게 되었다. 같이, 때론 각자 '건축 설계'에 대한 비슷한 꿈을 꾸었다. 수년 동안의 건축공학과 생활 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건 그가 거의 유일하다.


내가 베를린에 온 그해, 그는 혼자 베를린으로 여행을 왔었다. 좁은 내 방에 같이 묵으며 제법 긴 휴가를 보냈다. 그다음 해, 그는 그의 아내와 베를린으로 유학을 왔다. 마침 유학을 고민하던 중, 베를린 여행이 사전답사가 된 셈이었다. 나의 베를린 정착에도 큰 도움이 되었던 K선배가 그들 부부를 특히 많이 챙겼다. 그렇게 한 동안 그들 부부와, 선배 K와 주말에 만나곤 하며 타지 생활의 큰 의지가 되었다. 연말연시 같은 연휴기간에는 다 같이 모여 명절처럼 지내기도 했다. 우리는 가족이었다.


그는 섬세하고 꼼꼼한 편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굉장히 살뜰하게 챙긴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그랬다. 술에 만취해 인사불성인 나의 목숨을 건진 적도 있었고 갈 곳이 없어 방황하던 나의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했다. 길고 지루한 건축에 대한 난잡한 생각에 장단을 맞춰주기도 했다. 내가 스페인에 적응하던 그때도 온갖 귀찮은 서류 작업을 한국에서 대신해 주기도 했다. 가끔씩 한국에 들어갈 때도 기나긴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나는 그에게 참 받은 것이 많다.


그런 후배 S는 베를린에서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한국에서 졸업 후 꽤나 긴 시간 동안 실무에 있었던 그인지라 모든 것에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것이 조금 답답했을 것이다.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고 도시와 친해지고 새로운 일상생활의 큰 틀을 잡는 것은 여러모로 혼란스럽다. 난 그럴 때마다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어학 코스는커녕 공부라곤 해 본 적이 없는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끔 주말에 만나 밀린 수다를 떨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전부였다.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들에 그는 적잖이 힘들어했다. 유학 초기에 뜻대로 풀리지 않는 어학과 학교 지원 과정 동안 누구에게나 겪어보지 못한 큰 스트레스다. 지난 시간을 그리워하며 스스로와 외로운 싸움을 견뎌야 하는 가장 고독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서 잘 아는 선배가 놀러 왔었다. 이래 저래 모인 여러 명이 어울린 술자리가 벌어졌다. 워낙 오랜만에 만난 사이들이었고 그동안 어떻게 사는지 왕래가 없어서 자리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살짝 술기운이 올라온 내가 그에게 말실수를 했다. 힘들어하는 그를 몰아붙이고 쏘아붙였다. 그의 자존심을 건드려 버렸다.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어 버렸다.


처음엔 시간이 지나면 예전처럼 다시 지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막역하게 지내온 절대적인 시간도 길었고, 나 스스로가 그 날의 실수 외에는 떳떳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시간이 가도 그와는 연락이 닿지 않고 그의 마음을 열 길은 없었다. 그렇게 난 또 하나의 친구를 잃었다.


어떤 사람과 연락이 끊기거나 서먹해진 적은 있으나 이번만큼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다. 충격이 컸던 만큼 변화도 컸다. 인간관계를 다시 바라보게 됐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 관계를 소중히 생각하는 만큼 모든 일을 더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 그건 사실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보아왔고 계속 볼 것이라 생각하며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던가. 후배 S가 나에게 준 마지막 선물은 너무나 컸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지루한 농담처럼 그와의 관계가 제물이 되었다.

그 뒤로 정확히 그와 두 번 마주쳤다. 그때마다 어색한 상황에도 적응을 해야 했고 불편해진 공기를 모른척하려 노력해야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지만, 난 여전히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대체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을 잃어야 관계를 더 귀중하게 생각할까.


아이의 출생신고 때문에 베를린 서쪽의 샬롯텐부어크(Charlottenburg)구청에 간 적이 있었다. 행정구역상 내가 사는 지역과는 상관이 없는 지역이었지만 아이가 출생한 병원이 그쪽 행정 관할이라 굳이 거기까지 가야 했었다.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아이의 출생과 관련된 서류 절차를 다 끝내고 나오는 길에, S후배 부부를 거짓말처럼 우연히 마주쳤다. 지하철 역에서 짧게 안부를 나누고 거짓말처럼 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음에 꼭 보자는 이야기도 꺼내지 못했다.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많이 흐르고 기억이 흐릿해져야 더 편하게 이야기할 기회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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