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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간

by 베를린 부부-chicken

by 베를린부부

작년 연말이었다. 삼주 정도의 성탄절 휴가기간 동안 우리 가족은 자발적 집콕을 하고 있었다. 한국을 다녀오느라 소진된 자금과 아이의 첫 돌에 맞춰 계획 중인 뉴욕 여행을 위한 자금을 맞추기 위해 집에서 최대한 조용히 보내자 했었다. (물론, 코로나로 인해 모든 뉴욕 일정은 취소되었다. 그로 인해 자발적 집콕은 사상 최대 몇 달째 이어지고 있다.) 그러던 12월 30일 새벽, 모르는 메일이 한 통 왔다. 효형출판의 편집자분이 보낸 메일이었다. ‘건축으로 먹고 살기 -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편'의 출판 제의였다.


브런치에 많은 작가분들이 올려주신 출간에 대한 이야기들을 보며 마냥 다른 세상 이야기만 같았다. 나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는 내 글들의 어설픔이 더욱 그렇게 만들었다. 거창한 것 없이 그저 나의 시간을 정리한다 생각하고 꾸준히만 썼다. 스페인을 떠나 독일로 오며 언젠가 기회가 되면 스페인에서의 시간을 정리해야겠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대로 그냥 잊어버리면 없어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마드리드에서의 시간을 글로 옮기지 시작한 것이 2019년 2월이었다.


‘건축으로 먹고살기’ 시리즈는 내가 유럽에서 머문 도시들을 배경으로 그곳에 있었던 시간의 기록이다. 2008년부터는 마드리드에, 2011년부터는 바르셀로나, 2014년부터는 베를린이 배경이다. 지나간 시간들을 글의 형태로 기록하기 위해 가물가물한 기억과 사진들을 뒤적이며 지난날의 나와 마주했다. 그렇게 브런치에 연재한 '마드리드, 바르셀로나'편의 글이 모두 25편이다. 연재하는 25주의 시간 동안 누군가 이 글들을 읽는다는 것은 '통계'를 통해 확인하고 있었지만 이 글들이 다시 책으로 엮인다는 것이 사뭇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출판사의 출간 계획서를 확인하고 이해가 갔다. 어떠한 의도에서, 어떠한 방향으로 이 글들이 책으로 엮이게 될지. 그리고 난 거기에 찬성했다. 전체 일정은 대략 3-4달 정도로 비교적 짧은 편이었다. 그것마저도 좋았다. 나만 열심히 하면 됐다.


원고 계획서가 오가고 일정을 정리하고 필요한 원고 분량을 덧붙여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고 작업을 시작하기 전, 스스로 뚜렷한 목적을 설정하고 싶었다. 과연 나는 이 작업을 왜 하려고 하는가. 이 책에 담길 이야기가 나에게 무슨 의미일까. 나는 무엇 때문에 마드리드로 갔을까. 스페인에 있는 동안 이런 일들이 있었지. 에세이인만큼 일단 나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을 정리하고 메시지를 담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한 문장, 한 문단, 한 단락들이 모여 책이 되었다. 썼던 글을 고쳐 쓰고 덧붙이고 다시 쓰고를 반복했다.


원고를 작성하는 것도 처음이거니와 출판사 편집자 분들과도 물론 모든 게 처음이었다. 아내가 다행히 예전 출간 경험이 있어 작업 내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원고를 쓰고 계약서가 오가고 일은 계속 진행됐지만 모든 건 여전히 낯설고 도통 현실 같지가 않았다. 보통 잦은 미팅으로 의견 조율 및 전체 편집 방향에 대해 많이 토론한다고 하던데 나는 시차 및 장소 등 어떤 물리적 여건도 맞지 않았다. 오직 이메일로 모든 사항이 오갔다. 출판사 분들과도 아직 뵌 적이 없다. 그냥 이메일로 통성명한 것이 전부다. 그렇게 사이버상으로 알게 된 출판사 편집자분들은 국어 선생님이자 빨간펜 선생님들이었다. 내가 두서없이 써 내려간, 마음이 엄청나게 앞서갔던 서툰 원고를 알아듣기 쉽게, 정말 필요한 말만 가려서 정리해주셨다. 몇 번의 교정 과정에 정말 많은 것을 느꼈다. '아, 내가 이런 습관을 가지고 있구나.' '아, 나는 말을 정말 장황하게 한다.' 등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선물 같은 기회였다.


프로들의 손길을 느낄 때마다, 생각지도 못한 채널에서 앞으로 나올 책에 대한 정보를 접할 때마다 아주 조금씩 '진짜 나오긴 할 껀가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는 물론 알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를 아는 어느 누구라도 이 소식을 들으면 "뭐? 네가? 왜?" 이럴 것이 뻔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정말 출간이 돼야 현실로 느껴질 것만 같아서이다. 마음 같아선 손에 책을 잡아 봐야 현실감각이 생길 것 같지만 코로나로 인해 책을 받아보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내 친구들은 마드리드를 거쳐 바르셀로나에서 베를린까지 살아온 나의 시간이 평범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결혼 전, 베를린에서 나는 외롭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맨땅에 헤딩하는 방식은 예전부터도 그랬으나 특히 이곳은 아는 사람도 많이 없었고 어디서 어떤 조언을 구해야 하는지, 어디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막막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부디 누군가의 그런 순간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나보다 앞서 간 사람이 남겨 준 흔적을 내가 따라왔듯이.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로 떠날 때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바르셀로나에서 베를린으로 떠날 때는 도리어 겸손했다. 예상치 못한 순간을 마주하면서 뜻대로 되는 일은 애초에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도, 세상을 대하는 방식도, 나 자신도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기 힘들기에 당장 눈에 보이는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자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치열한 하루를 살아야 내일의 그림이 내가 꿈꾸던 쪽으로 그려진다고 믿고 있다. 한국에서 살면서 늘 해왔던 생각을 하며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도통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지금보다 멋지지는 않을 것 같다고 믿고 싶다.


지난 12년 동안 남은 것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나의 지금이 남았다고 말하고 싶다. 오늘은 어제 상상했던 내일과 일치하지 않는다. 과거의 나는 화려한 작업을 하는 건축가가 될 줄 알았으나,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천천히 깨닫고 있다. 내가 40대를 떠올리며 머릿속으로 그렸던 모습은 어떤 것도 현재와 일치하지 않는다. 꿈꿨던 미래가 항상 나의 현재와 달라도 나는 행복하다.


과거는 현재의 행복과 상관없다는 것을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상상했던 화려한 건축은 오늘의 나에게서 찾아볼 수 없지 만, 그보다 훨씬 값진 경험을 했다. 이 책도 그 일부이다. 상상도 못 해본 기회로, 재미있는 작업을 하게 됐다. 이런 식으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그것이 나의 현재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32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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