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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린부부 Sep 07. 2020

부부싸움에도 규칙이 필요하다

by 베를린 부부-chicken

우리 부부는 다툼에 대해 몇 가지 규칙을 가지고 있다. 장거리 연애로 시작한 탓에 연애시절부터 만날 때마다 시간이 항상 넉넉하지 않았다. 다툼으로 인한 시간 낭비를 줄이자고 시작된 서로의 동의가 ‘규칙’으로 진화했다. 경험상, 다툼이라는 것이 싸움(혹은 개싸움)이 되는 것은 너무 미세한 차이다. 불길한 기분에 알 수 없는 묘한 표정들이 엄습할 때 의외로 쉽게 화해가 될 때가 있다. 반대로 의도치 않게 사소한 다툼이 어마어마한 싸움의 시작이 될 때도 있다. 이 사람과 한 집에서 살며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다툼이라면 두 사람 모두가 수긍 가능한 일정한 규칙들을 만들어 놓을 필요성을 절감했다. 싸운 뒤 감정처리를 위해서도, 묵은 감정을 오래 가게 하지 않기 위해서도.


첫 번째, 오늘의 다툼은 오늘 해결한다.

처음엔 이게 참 어려웠다. 특히나 잠자리에 들기 직전 어이없는 말다툼으로 시작한 경우, 잠들기 전 길지 않은 시간 내에 서로의 감정을 정리하고 사과하는 것은 쉽지 않다. 교무실에 끌려간 것처럼 대화를 위해 억지로 한 자리에 앉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의 최대 장점은 솔직한 대화다. 뭐가 싫었고 뭐가 나를 화나게 했는지에 대해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으니 돌려 말할 재간도 없다. 최대한 가감 없이 솔직하고 간결하게 다툼에 대해 이야기한다. 처음엔 미안하다는 말도 그 잘난 자존심에 돌려 말하곤 했는데 이젠 그런 거 없다. 잘못한 건 미안하다 사과하고 그만큼 상대방의 사과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 이게 가능할까 싶지만 이것도 일종의 연습인 것 같다. 상대방에게 사과는 했지만 이게 진심일까 하는 스스로의 의구심도 시간이 갈수록 ‘미안해’라는 말로 나올 것이다.


두 번째, 부부간의 다툼은 집 안에서 해결한다.

어차피 우리 둘 다 베를린에선 타지인이다. 그게 외롭다면 한 없이 외롭다. 그러나 부부의 다툼이 집 밖으로 번질 수 있는 가능성은 적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결혼 초반, 티격태격 다툰 후 아내가 씩씩거리며 핸드폰도 두고 바람을 쐬러 나간다며 획 나가버린 적이 있었다. 그때의 불안감이 이런 규칙을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이곳에선 우리 둘 다 나가봤자 갈 곳도 없고 마땅히 생뚱맞은 시간에 불현듯 만나자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밖으로 나간다는 말이 더 겁이 나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서로가 날카로운 감정을 가지고 아담한 집에 같이 있다는 것이 불편했다. 눈에 띌 때마다 신경 쓰이니 말이다. 그럴 땐 책이든 핸드폰이든 눈을 집중할 수 있는 곳에 몇 시간 눈을 붙잡아 두는 것도 괜찮다.


 번째, 스스로 정한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꼭 지킨다.

어떤 생각을 품은 어떤 말은 깊은 상처를 만든다. 주로 오래된 생각들이 즉흥적으로 나의 통제를 벗어나 입으로 나오는 말들이 보통 이렇다. 일명 ‘말실수’라 일컫는 이 일상적 언어습관은 ‘잠재적 생각’에 기초를 한다. 그러니 무언가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이 있다면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없애는 것이 가장 좋다. ‘아내는 정리를 못한다.’라는 것보다 ‘아내는 정리를 못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의도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내 머리가 정말 그렇게 믿어 내 입으로 그 말이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나의 무의식까지 바꿔버리는 것이다. (사실 이게 되는지 아닌지 나도 아직 열심히 실험 중이긴 하다.) 쉽지 않고 시간도 오래 걸릴 듯하다. 그렇게 세뇌에 가깝도록 속으로 외치고 다짐해도 정작 속에서 무언가 묵직한 것이 올리오면 미꾸라지처럼 입으로 말들이 빠져나가버린다. 오랜 전 영화 ‘나쁜 녀석들 (Bad boys)’나온 것 같은 방법도 생각 중이다. 위험한 고비의 순간마다 말도 안 되는 무언가를 되뇌는 것이다. ‘우싸아~’ 이렇게. 특정 동작으로 내 행동과 언행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 다툼의 주제를 벗어나지 않는다. 

다툼이라는 것은 결국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것이다. 어디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집에서는 점잖게, 심지어 마주 앉아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그건 드라마나 '신화'만큼이나 믿기 어렵다. 감정이 서서히 달아오르며 심장박동수가 올라가면 언성이 높아지고 눈썹은 금세 10시 10분이 된다. 이 부분이 다툼의 고비다. 여기서 다툼이 감정싸움이 되어 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심지어 서로의 캐캐 묵은 감정까지 입으로 말이 되어 나온다면 그건 바로 더 복잡하고 심오하며 다각적인 다툼으로의 진화를 뜻한다. 온갖 종류의 감정개입을 막기 위해 중요한 것은 당장 다투고 있는 그 주제 안에서만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만약 화장실 청소문제로 다툼이 일어났다면 그날은 오로지 화장실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화장실에 널린 머리카락이 오늘 다툼의 시작이라면 수건을 쓰는 방법과 드라이기를 놓는 방법 등이 카메오로 등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부엌의 문제를 끌어들이면 안 된다. 그런 식으로 다툼의 영역이 넓어지면 결국 인신공격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나간 감정 이야기, 혹은 타임캡슐에 묻어 다음 생으로 보낸 이야기들도 등장한다면 그건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내 감정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반대의 경우도 물론 마찬가지다. '아 그러네.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라고 상대방이 생각할 수 있도록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의 형태로 나의 감정을 정리해서 전달하는 것. 이것이 가장 세련된 다툼의 방법일 것이다. (사실 이 정도면 다툼이라는 단어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그냥 '회의'정도.) 물론 그렇게 세련되게 서로의 생각을 전달받고, 인지하고, 행동하려 애쓰는 순간들도 있다. 조금 큰 틀에서 보면 어떤 시기는 서로가 여유롭게 상대방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감정으로 넘쳐나는 시간들이 있다. 그러나 반대로 툭 건들기만 해도 백만 볼트 전기의 기세로 째려보며 대화가 시작되는 시간들도 있다. 두 사람이 한 지붕 아래 살며 함께 보내는 그 수많은 시간들 사이로 넘실대는 다툼의 시간들은 멀리서 보면 자잘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한없이 크게 요동치는 파도와 같다. 


위 규칙들을 관통하는 개똥철학은 이것이다. ‘오늘의 다툼을 내일로 가져가지 말자’. 그렇게 치열하게 다투고 싸우는데도 눅눅한 감정들이 남기도 한다. 자잘하게 남은 감정들이 순식간에 집안 공기를 어색하게 만들기도 한다. 최대한 남은 감정들을 빨리 털어내는 것은 모두를 위한, 그리고 스스로를 위한 일종의 생존전략이기도 하다. 어떨 때는 세상 모든 것이 너무 쉽게 스트레스로 변하니까. 사실 둘만의 다툼 말고도 우리의 일상에 스트레스의 원인들은 워낙 많고 방대하니까. 그래서 뭐든 빨리빨리 털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면, 반강제적으로라도 새로 시작하는 것처럼 새로운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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