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베를린 부부-chicken
푹푹 찌는 더운 여름 날씨. 출퇴근 길이나 사무실 어디에도 에어컨이 없는 날씨는 일상에서 정말 벗어나고 싶게 만든다. 나에게 여름휴가의 클래식은 어릴 적 매년 8월 첫째 주에 가족들과 함께 보낸 휴가다. 그 더운 여름날의 태양보다 더 뜨거웠던 도로, 어딜 가나 사람이 바글바글한 피서지, 바가지요금. 계곡에 계곡을 돌며, 바닷가를 돌며 열심히 사진기에 추억을 담던 그 시절이 나에겐 잊히지 않는 '여름휴가철'의 정의이다. 그리고 슬프지만 이제는 부모님이 모든 걸 알아서 해 주셨던 그 여름휴가철을 자발적으로 계획해야 한다.
2020년은 여러 모로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연도이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지금의 상황에도 사무실 전체 캘런더를 보면 사람들은 여전히 각자 바쁘게 휴가를 오가고 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업무가 엉키지 않으면 각자 알아서 휴가를 쓰는 분위기지만 그래도 여전히 8월은 가장 휴가를 활발히 가는 시기이다. 학교가 방학을 해서이기도 하고 더운 날씨를 전혀 받쳐주지 못하는 근무환경 탓이기도 하다. 그리고 베를린은 6월부터 10월 사이에 공휴일이 없어 휴가를 쓰지 않고 오롯이 여름을 나는 것은 힘들다. 그러나 아무리 덥고 짜증이 나도, 이번 여름을 '최악'이라고 하기엔 아직 여유가 좀 있다.
내 기억 속 최악의 여름휴가는 바르셀로나에서였다. 스페인의 여름 날씨는 보통 더운 편이 아니라 보통 8월을 통째로 쉬곤 했다.(벌써 수년 전 일이므로 굳이 과거로 표현한다.) 속된 말로 셔터를 닫아버리는 건데 길어봐야 1년에 가장 긴 여름휴가를 일주일 정도 보내는 한국사람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1달이라는 시간 동안 연락이 안 된다고? 근데 사람들이 그걸 이해한다고? 그러나 역시 사람의 적응의 동물이던가. 몇 해를 거치며 눈으로 보고 직접 느껴보기도 하니 진짜로 그렇게 하긴 하는구나까지는 이해하게 됐다. 그러나 머리가 이해를 했다고 해서 보람찬 꿀휴가를 보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당시 1달이 굉장히 빠듯하게 돌아갔다. 1달이나 되는 긴 휴가를 즐기기 위해 여러 달을 고민하고 준비하고 미리 예약하는 등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무엇보다 금전적인 준비를 위해 꽤나 오랜 기간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휴양'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나에게 당연 휴가는 나 혼자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혼자만 먹고 자고 놀러 다니는 '1인 여행'이었다. 유일한 동료들이자 친구들인 사무소 동료들은 더운 8월의 태양을 피해 각자의 본가로 돌아가거나 연인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곤 했다. 나도 어디론가 가야겠다는 생각에 2주 정도 되는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그 참에 포르투갈로 가 건축가 '알바로 시자'의 작업을 진창 보고 오자는 생각이었다. 고민 고민 끝에 루트를 짜고 숙소를 정하고 이곳저곳에 예약을 하고 연락을 하던 도중, 결국 나는 모든 일정을 다 취소해야만 했다. 도저히 아끼고 아껴도 더 쥐어짤만한 자금이 마련되지 않아서.
그렇게 보낸 몇 번의 우울한 여름휴가 후에 차츰차츰 가장 큰 연중 휴가에 대해 큰 틀이 잡히긴 했다. 1년에 한 번, 비중 있는 긴 휴가를 쓴다면 그건 매년 한국행이었다. 으레 1년에 언제 한국을 갈지 정해 놓고 나머지 휴가를 생각한다. 작년엔 겨울이었고 그 전년도는 봄이었다. 그러나 2020년은 사상초유로 기약조차 없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한국에 갈 수는 있을까 싶다. 한국을 방문하는 시기에 모호해짐에 따라 모든 일정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 이미 8월은 막바지다. 이번엔 꼭 여름이 아니어도 좋으니, 더운 여름을 참으라면 굳이 좀 더 참겠으니 선선히 불어올 가을바람이나 편하게 맞을 수 있으면 싶다. 더운 날씨를 지나며 그렇게 기다린 마음이 무색하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