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 추억이 될까

by 베를린 부부-chicken

by 베를린부부

갓 대학에 입학해 '대학생활'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한 매일을 보내던 20살 신입생 시기였다. 20살을 맞이한 나는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듣고 자란 '대학만 일단 가면'이라는 가정이 만들어낸 환상에 젖어 있었다. 그때까지 까까머리와 교복에 억눌려있던 스트레스를 이제는 분출하기만 된다고 생각했다. 모든 만사를 제쳐두고 대학입시를 향해 달려온 나는 무조건 열심히 놀았다. 그다음이라는 먼 훗날에 대한 염려, 장래라는 단어는 당시 나에게 너무나도 먼 이야기였다. 계획? 단기계획은 항상 있었다. 4월에는 꽃놀이, 5월에는 축제, 6월에는 단체 엠티 등등 다달이 굵직한 행사계획은 빼곡히 있었다.


시험이 아주 잦았던 공과대학에 입학한 난, 결국 첫 학기가 시작한 지 채 1달이 되지 않아 공부를 포기했다. 대학만 가면 장땡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현실에 너무 큰 배신감을 느껴서였다. 그리고 생각보다 해야 할 공부의 양이 너무 많아서 이기도 했다. 주변에 놀거리는 너무나도 많은데 그걸 모두 소화하며 공부는 어차피 병행할 수 없었다. 하루씩 하루씩 수업과 멀어지고 안 가게 되고, 재미가 없어지고, 학교가 싫어지기까지 했다. 공부할 거리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과는 만날 기회가 적어졌다. 같이 놀러 다니는 친구들만 더 자주 만나게 되었다.


고등학생 때 알게 되어 여태까지 인연이 이어진, 20살 성장통을 함께 겪은 친구들이 있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보는 그 친구들과의 관계처럼 좋은 순간도 지질한 순간도 슬픈 순간도 함께한 친구들이다. 한 번은 그 친구들과 신촌 어딘가에서 함께 모였다. 왜 그 장소에서 모이게 됐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내가 친구들을 모은 건 확실하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른 대학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며 깊은 회의감에 학교를 자퇴하고 싶다는 고민을 이야기했다. 사실 돌이켜보면 꼭 자퇴가 아니어도 여러 가지 다른 방법들도 있을 것 같은데 20살의 나는 그게 유일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친구들은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어떤 친구는 안된다는 완강한 반대와 함께 설득을 했고 어떤 친구는 내 생각대로 해야 한다고 지지하기도 했고 어떤 친구는 대수롭지 않게 그런 일로 모였냐고 타박하기도 했다.


나는 이 날을 내 20살의 최초의 좌절과 방황으로 기억한다. 왠지 누군가에게 속은듯함 그 느낌을 한동안 잊기 힘들었다. 결국 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시간을 낭비하며 1년을 보냈다. 21살에 군대를 가기 전까지, 나의 20살은 그렇게 어영부영 지나갔다. 사실 입대를 결정한 것도 내가 아니었다. 3회 연속 학사경고는 제적이었다. 그걸 알아버린 부모님이 부랴부랴 등을 떠밀어 가게 된 것이었다. 단언컨대 그때 입대를 하지 않았다면 난 분명 대학에서 제적당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진지하고 심각했다. 스스로 자아를 형성해 가는 그 과정이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좌충우돌이었다. 처음에 보는 것도 천지였고 궁금한 것도 많았으면 시행착오도 수없었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 거창하게 포장하고 싶은 그 고민들은 때로는 아픔이기도 했고 슬픔이기도 했고 즐거움이기도 했다. 마치 그 고민들을 지나기 위해 예정되었던 시간처럼 그렇게 20살을 보냈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난 그 순간을 추억이라며 기록한다. '추억'의 사전적 정의는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정도이지만 왠지 '추억'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결은 조금 더 낭만적이다. 안 좋았던 기억을 적당하게 가리킬만한 단어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흘러 어느덧 가장이 된 그 청년은 지금도 바쁜 일상을 살고 있다. 20살의 내가 연애와 취미생활에 너무나 바쁜 나날들을 지났다면 지금의 나는 직장과 가족생활로 바쁜 나날들을 지난다.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들을 들여다보면 코미디처럼 나와 아내는 그대로인데 아이는 부쩍부쩍 바뀌는 것에 놀란다. 마치 콜라주처럼 가져다 붙인 것 같다. 지금이니 그렇지 아마도 시간이 갈수록 우리 부부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더 뚜렷해질 것이다. 우리 부부는 우리 아이와 벌써 16개월을 함께 살고 있다. 임신기간까지 합하면 2년이 넘어가는 시간이다. 정말 쉽지 않은 이 시간을 지나며 예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많은 감정들을 경험한다.


왠지 20살의 그 날들보다 더 긴 호흡으로 지나가는 듯한 지금의 24시간도 분명 훗날 추억이 될 것이다. 그때는 지금을 어떻게 기억할지, 앞으로 더 시간이 지나 20살의 기억이 어떻게 바뀌어 갈지, 참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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