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베를린 부부-chicken
건축이라는 분야의 특성상 공개모집의 형태인 '공모전'은 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꽤나 일반적이었다. 경쟁자들이 동일한 조건에서 출발해 일정기간의 작업 기간을 거친 후 작업 결과를 심사받는 형식의 이 제도는 주최자에게 아주 유리한 제도이다. 내가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하며 친해지기 시작한 이 '공모전'과의 인연은 대체 끊어질 줄을 모른다. 시간이 흐르고 나의 주변 환경이 여러 번 크게 변하는 동안, 나의 신변 역시 여러 차례 변하는 동안에도 그래 왔다. 더군다나 이 공개 모집의 형태가 현재 내가 먹고사는 일상을 이렇게 많이 차지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으니 말이다.
학생 시절에는 그저 남들과 다른 한 줄의 이력을 위해, 혹은 상상만으로도 흐뭇해지는 달콤한 상금을 위해 학생공모전에 매달리곤 했다. 그래도 당시 공모전에 임하는 태도는 확실히 지금의 나의 마음가짐보다 더 순수했다. 실험정신, 도전정신 등 거창하게 내뱉는 주최 측의 단어들에 아주 잘 들어맞는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절박함보다는 투지가 더 앞섰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에 써보는 말이다, 투지)
현재 나에게 공모전이란 먹고사는 수단이다. 회사에서의 주 업무가 공모전이니 그걸로 월급을 받는 셈이다. 회사 조직 80여 명 중 나와 같은 팀에서 비슷한 업무를 하는 사람은 대략 6-7명 정도이다. 많으면 많고 적다면 적은 이 인원들이 1년에 소화하는 공모전은 대략 60여 개에 달한다. 이를 다시 1달로 나누면 5개 정도이니 '평균'을 굳이 내자면 1년 내내 1주일에 한 번씩은 무언가를 제출하는 셈이 된다. 일반 공모의 특성상 이 노동의 대가는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다른 말로, 상을 받을 때도 있고 대부분의 경우는 아니다. 아주 기쁘게 1등에 당선되는 경우, 상위 몇 팀에 랭크되어 상금을 차지하는 경우는 그 결과만으로도 고생을 심리적으로 보상받는 기분까지 든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에서 일했던 사무실들은 현재의 사무실보다 작은 규모였다. 그러니 공모전은 직원 전체의 업무였다. 공모전의 마감시기가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달라붙었다. 특히 마지막 일주일 정도의 시간은 모두가 자신의 본연의 업무를 제쳐두었다. 그렇기에 이런 방식은 좋은 결과에 대한 만족도가 아주 높다. 모두가 함께 이루어 낸 소중한 '우리들의 작업'이라는 연대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도 반대로 서로를 위로하고 다음을 기약하곤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업무가 워낙 급한 사람들은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했다. 사실 그 일을 더한다고 자신에게 직접적인 혜택이 있는 건 아니니까.
반면 현재 일하는 사무실은 건축사무소로서는 작은 규모가 아니다. 그렇다 보니 효율을 위해 나름 업무가 세분화되어 있다. 수년 동안 비슷한 업무를 하는 경우가 보통이고 아주 가끔 소수의 사람들이 전혀 다른 업무를 경험하게 된다. 나도 마찬가지다. 지난 6년여 동안 비슷한 업무만 해왔다. 보통 몇 달을 주기로 공모전을 시작하고 지지고 볶다가 제출을 하고 결과가 공개되는 동안 다른 공모전을 시작한다. 우리들의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하는 공간', 혹은 '사는 공간'을 설계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몇 달씩, 몇 주씩 앞에 놓인 마감을 보고 오다 보니 이렇게 왔다.
공모전의 결과는 개인의 실적과도 연관이 있다. 당연히 내가 몇 달 동안 고생한 작업의 결과가 좋으면 일한 사람도 좋고 그로 인해 새로운 일을 수주하게 된 사무실의 입장에서도 좋다. 아쉽게도 좋은 결과는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경기에는 매번 들어가지만 골은 항상 넣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그럴 땐 매번 경기에 뛰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무언가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열심히 했지만 좋은 결과가 따르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 비슷한 과정이 수년 동안 반복된다면 어느 순간 동기를 찾기가 힘들어진다.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공모의 본질적 특징은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진다는 것이다. 결과가 너무 뚜렷한 이 본질적 특성과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는 것이 좀 두렵긴 하다. 결과를 강조하는 그 본성이 내 일상에도 스며들까 하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성악가 '사무엘 윤'이 TV인터뷰 중에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14번째 도전한 콩쿠르(Concours, 음악 및 미술 등의 기능을 장려할 목적으로 경연을 벌여, 서로 간의 우열을 겨루게 하는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는 그의 인터뷰를 보며 난 그런 생각을 했다.
'어떻게 14번째 도전할 생각을 했을까? 13번 낙방하는 동안 어떻게 스스로 동기부여를 했을까?'
아마도 이기고 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생각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13번의 도전 동안 성장해가는 본인이 동기를 부여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여러 시도 속에 본인만의 감이 생겼을 수도 있다. 아, 몇 번 정도 더 해보면 알 것 같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기고 지는 것이 너무나 뚜렷한 본직적 특성 속에서 저럴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에 감탄했다. 반면 난 그저 이기고 지는 것에만 너무 묶여 있었다.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데.
1년에 두어 번 정도 결과보다 과정을 고대하게 만드는 '흥미로운' 작업들이 있다. 우리들의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업무공간이나 주거공간이 아니라 문화공간 등을 만드는 일은 그 희소성이 과정을 더욱 즐겁게 한다. 그래서인지 그 희소성을 기다리는 소소한 설렘이 있다. 차가운 본질 속에서 따뜻함을 유지하는 그 소소함.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그 설렘을 반복되는 일상이 잡아먹지 않기를 오늘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