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베를린 부부-chicken
나의 어린 시절, 우리 아버지는 우리 가족의 사진을 참 열심히 찍으셨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우리 남매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가 애지중지 아끼는 카메라가 있었다고 한다. 희미한 사진 속, 모서리가 닮은 검은 가죽 카메라 케이스에 둘러싸인 카메라. 당시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는 그 카메라. 우리 가족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그 카메라로 아버지는 우리 가족의 사진을 참 열심히 찍으셨다. 그렇게 한 장씩, 필름 한통씩 고이 찍어 인화된 사진은 고스란히 여러 권의 앨범으로 남았고 불과 수년 전까지 부모님은 이사를 가실 때마다 그 여러 권의 앨범들을 열심히 가지고 다니셨다. 그 후, 아버지가 점차 여유 시간이 많아지시며 앨범 속, 수없이 많은 사진들을 낱장씩 스캔하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그 기간 동안 이 불효자식은 한국에 없었다.) 그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스캔'을 향한 아버지의 열정은 수년 동안 불타올랐다. 그리고 드디어 얼마 전, 아버지에게서 대용량 메일이 도착했다. 이제 정말 마지막까지 다 스캔하셨다면서 보내신 마지막 사진 묶음이었다.
아버지의 열정 스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사진들은 그가 정성껏 분류한 폴더의 이름대로 이제 나의 컴퓨터로 옮겨졌다. 그는 연도별로, 테마별로, 중요한 장소는 특별 테마로 열심히 우리 가족의 추억을 정리했다. 그렇게 나의 유년시절, 학창 시절이 디지털로 복원되었다. 유년시절의 나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집 아이와 내 어릴 적 사진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 아내가 나의 백일사진과 우리 집 꼬맹이를 번갈아 보며 폭소하는 부녀의 DNA는 나 스스로 봐도 참 놀랍다. 이후 사춘기에 접어든 과거의 나는 시종일관 뚱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본다. 그 시절 항상 쓰고 다니던 안경은 왜 저리도 지저분한지, 카메라 플래시가 안경에 묻은 지문에 반사된 모습을 보며 웃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20대 초반, 지금보다 몸무게가 10킬로는 덜 나가던 시절, 왠지 불쌍해 보이기까지 하는 나의 군복 사진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을 떠나오며 잃어버린 건 연락처뿐만이 아니다. 내가 사용하던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던, 외장하드에 저장되어 있던, 서랍 이곳저곳에 낱장으로 굴러다니던 사진들의 흔적도 모두 사라졌다. 스페인으로 향하던 28살의 나는 너무나 비장해서였을까, 5킬로씩 하던 두터운 책은 열심히도 챙겼건만 정작 나의 시간이 담긴 소중한 추억들은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다. 당시 자료의 저장 단위는 끽해야 Gb수준이었는데 출국준비물에 ‘추억을 회상하기 위한’ 준비물은 하나도 없었다. 한국을 떠나 정착하고픈 마음은 나름 간절하면서 무언가 불리한 시점에서는 자주 가져다 쓰는 핑계가 그것이었다.
‘에이, 몇 년 뒤에 다시 올 지도 모르는데 뭐.'
한국을 떠나 정착하고픈 마음은 간절했지만 빠져나갈 뒷문은 제대로 챙겨놓았다. 그리고 추억, 그런 거 없어도 괜찮은 줄 알았다.
내가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부모님이 몇 번의 이사를 하시며 행방이 묘연해진 것들은 연락처와 사진들뿐만이 아니다. 내가 무관심하게 지내는 사이 나의 지난 추억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물론 이사를 하신 뒤 정리하지 않으신 짐은 내가 한국을 가서 정리를 부지런히 했어야 했다. 그러나 매번 한국에 갈 때마다 난 노느라 너어무 바빴다. 심지어 나가서 놀 시간이 부족해 부모님과 밥 먹을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의 관심에서 멀어진 추억들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내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던 시절부터 사회초년생이 되어가던 순간들까지, 그 수많은 순간들이 담긴 사진 속 추억들이 좋다. 그러니 더 이상의 추억 분실은 견고히 막아야 한다. 이젠 내 추억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의 추억도. 내가 그렇게 내 지난 시간을 아버지의 사진을 통해 물려받았듯 나도 아이에게 고스란히 물려줘야 한다. 다행히 우리 아버지처럼 훗날 열정적으로 스캔할 일은 없을 것이다. 디지털 데이터를 홀랑 날려먹지만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