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베를린 부부-chicken
원래 자기 자신은 알기 힘들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으니 어떤 상황에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는지 도통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친구가 소중하다. 누군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 함께 있을 때 편안한 사람. 편한 말과 행동으로 본래의 성격을 볼 수 있는 사람. 어떤 사람은 본래의 모습을 보기까지 부쩍 오래 걸린다. 나는 좀 그런 편이었다. 있는 그대로 나를 드러내는 것이 좀 서툴다. 그냥 있는 그대로, 혹은 이리저리 생각하지 않고 보이는 나의 모습이 나 자신인데 그걸 인정하기 싫을 때가 있다. 때로는 감추기도 하고 꾸미기도 한다. 그래서 난 자신의 생각이나 모습에 아주 솔직한 친구가 늘 부럽고 좋다. 내 친구 Y가 그렇다.
친구 Y와는 대학에 복학할 즈음부터 친해졌다. 신입생 때부터 건너 건너 얼굴은 알고 있었으나 몰려다니는 친구들이 달랐다. 그와 친해진 후에 느꼈지만 그의 주변 인물들은 내 주변 인물들과는 성격이나 성향들이 많이 달랐다. 결이 비슷한 사람끼리 쉽게 친해진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다른 성향의 친구를 만나는 것은 꽤나 특이한 경우였다. 친구 Y와 가까워진 것은 '복학'이라는 쾌쾌하고 특수한 상황이 준 선물과도 같았다. 당시 20대 초반의 우리는 다들 절박한 복학생들이라 공부도 열심이었지만 우리의 젊음은 그만큼 더 열심히 놀게 했다. 밥도 열심히 먹고, 술도 열심히 마시고, 당구도 열심히 치고, PC방도 열심히 가고, 노래방도 열심히 가며, 미팅도 해야 하며 학교 축제도 즐겨야 했다. 그리고 학교 앞, Y의 하숙방은 언제나 친구들의 아지트였다. 그뿐만 아니라 몇 명의 친구들이 함께 하숙을 했지만 왠지 Y의 방이 제일 만만했다. 그의 털털한 성격만큼이나 그의 방은 쿨하게 지저분했고 그래서 더 편했다.
그는 솔직한 사람이다. 직설적인 날것의 정보를 이야기하지만 누구의 기분도 나쁘게 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지만 거슬리거나 분위기를 흐리지 않았다. 특히 누군가의 고민을 들을 때, 진솔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때가 멋졌다. 나에게는 유독 그의 이런 부분이 더 '어른'처럼 느껴졌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솔직한 말을 뱉어내는 것. 당시 나에게는 그게 없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못했지만 자신의 생각을 솔직 담백한 말로 기분 좋게 뱉어내는 것. ‘이렇게 말해도 되나', '저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등 생각이 많았다.(특히 '싫다'는 표현에 서툴렀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자신감이 조금 부족했었다. 동시에 다른 이의 이야기를 경청할 줄도 잘 몰랐다. 인간관계에 굉장히 서툴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다.
그런 자신감의 부재를 감추고 싶었었는지 말은 많았다. 그러나 언어유희로 내가 보이고 싶은 모습만 강조하는 '후천적 기술'은 한국을 떠나오며 쓸모가 없어졌다. 유창하게 구사하는 한국어로 분위기를 파악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 등은 익숙한 탓에 어렵지 않았지만 그 감정 표현을 외국어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모든 게 바뀌었다. 단순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 외에, 다른 것들이 어려워질수록 반 강제적으로 솔직해졌다. 온갖 수식을 붙이고 꾸밈말을 함께 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졌다. 외국어로 그렇게 하려면 할수록 그건 스트레스가 되어버렸다. 하루, 이틀, 일 년, 이년, 시간이 흐를수록 간단명료한 언어 방식이 생각하는 방식을 조금씩 바꾸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솔직한 감정의 표현은 내가 계속 도전해야 하는 대상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무언가 짜증이 확 나서 기분이 이상해짐을 느꼈을 때 실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난 지금 뭐가 이리 마음에 안 드는 것일까?’ ‘그게 그렇게 짜증 날 일인가’. 솔직한 표현은 그다음이다. 그게 쿨하게 스스로 납득되면 그냥 담백한 말로 덤덤하게 옮기면 된다. 뭐, 말처럼 쉽지가 않은 게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