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베를린 부부-chicken
내가 어릴 적 아버지는 출장을 자주 다니셨다. 젊은 엔지니어였던 그는 주변 국가로, 때로는 멀리 다른 대륙으로 이곳저곳 자주 다니곤 했다. 내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도 그는 그렇게 줄곧 출장을 많이 다녔다. 주변에 비슷한 아빠들이 있어서인지 어린 나는 그게 보통의 아빠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출장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마중하러 김포공항에 자주 갔다. 어머니는 나와 누나를 데리고 출국장에서 잠깐씩 열렸다 닫히는 자동문 사이로 아버지를 찾아내곤 했다. 흐릿한 어릴 적 기억, 가는 길은 황량한 논밭이었던, 그러나 항상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던 김포공항을 기억한다. 초등학교를 입학하며 이사를 한 탓에 그 후로는 한동안 김포공항에 갈 일은 없었다. 경기도로 이사 간 우리 셋은 더 이상 공항으로 아버지를 마중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출장에 다녀올 때마다 우리 세 식구의 선물을 사 오곤 했다. 한 번은 나에게 무얼 받았으면 좋겠냐고 물으신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어떤 이유인지 굉장히 뚜렷하게 고가의 장난감이었던 ‘레고’ 시리즈 중에서도 해적 시리즈를 가지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알았다고 했다. 내가 말한 레고는 한국의 장난감 가게에서 파는 레고였다. 이론적으로 아버지가 그 장난감을 사 올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 흘러 아버지가 입국하시는 날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어머니와 누나, 나는 공항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엔 온통 레고 생각뿐이었다. 드디어 자동문이 열리고 커다란 캐리어를 가지고 아버지가 나오셨다. 그리고 집에 가는 내내 생각했다.
‘그 레고가 저 가방에 들어갔을까.’
집에서 아버지가 캐리어를 여는 순간부터 별 다른 기억이 없다. 분명 아버지는 나를 위해 무언가를 사 오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아마도 내가 원했던 레고보다 더 좋은 장난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게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는다. 꼬마의 나에겐 ‘레고가 아니었다.’라는 것 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그 순간들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 외에 아버지의 출장과 관련된 특별한 기억이 없는 걸 보니, 당시 그 꼬마에겐 그 기억이 좀 큰 모양이었다. 당시의 실망감이 다른 모든 감정을 삼켰다. 그가 분명 출장 내내 나의 레고를 기억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회사원인 아버지가 일을 하러 가는 것이라는 것, 그래서 정말 빠듯한 일정으로 움직인다는 것, 개인의 여유 시간은 공항에서 탑승 전 밖에 없다는 것 등을 이해하기엔 내가 너무 어렸다.
여러 면에서 아버지는 그 만의 방식을 가지고 계신다. 하다못해 그의 노트북에 놀랍도록 정갈하게 정리된 파일들에도 그의 방식이 있다. 그건 하루 이틀이나 불과 몇 해에 걸쳐 생긴 것이 아니다. 그의 성격이자 기질이다. 그의 그런 면모를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할 성격의 것은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떠나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 봐도 그렇다. 좀 다를 뿐인데. 내가 꼭 전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야 한다. 아마도 난 아직도 사춘기 혹은 반항기 시절의 삐딱한 시선을 벗어나지 못했나 보다.
어릴 적부터 주변 환경이 변할 때마다 코가 먼저 반응하는 나는 항상 비상약을 챙겨 다닌다. (이건 대단히 유전적인 현상으로 아버지를 따라 내가 그렇고 아마도 우리 딸도 생긴 걸로 봐서 이걸 닮았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현재 우리 가족은 정말 오랜만의 한국 방문으로 자가격리 중이다. 올해 가장 큰 변화를 겪는 중이다. 근데 마침 나의 비상약이 딱 떨어져 버렸다. 코맹맹이 소리로 전화통화를 하니 아버지가 알아차리셨다. 나는 ‘이런 이런 약이 효과가 좋았으니 이걸로 좀 사다 주세요.’ 이렇게 전했다. 그리고 먼 길을 달려오신 아버지가 건네주신 약은 다름 아닌 본인에게 가장 잘 맞는 약이었다. 판피린.
예전 같았으면 좀 황당했을 것도 같은데 이번엔 왠지 모르게 웃음이 씩 났다. 무언가 나의 아버지를 좀 더 이해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그는 본인에게 아주 잘 통하는 약이니 너에게도 잘 통할 것이라 생각하고 사 오셨을 것이다. 내가 사진으로 찍어 보내드린 그 약보다 자신이 선택한 그 약이 더 효과적으로 잘 들을 것이라 판단하신 것이다. 이것을 두고 한 때는 ‘아버지는 내 의견을 무시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름의 생각으로 확신에 찬 선택을 한 것이다. 그의 아들을 위해서. 내가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코가 꽉꽉 막힐 때마다 조그마한 병에 들은 판피린을 마시곤 하셨다. 그러니 ‘코가 좀 막힌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내심 판피린을 사갈 생각을 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냥 그것이 그의 방식인 거다.
레고의 본질은 장난감이다. 판피린의 본질은 약이다. 그러나 때로는 관계가 가진 시간이 그 본질을 대신 설명한다. 나에게 이제 판피린은 단순한 약이 아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이다. 나의 레고를 대체했던 기억나지 않는 그 장난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