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베를린 부부-chicken
난 '건축공학과'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요새는 학과 이름이 바뀌어 '건축학과'와 '건축공학과'가 나뉘었다고 하던데 그때는 그냥 공과대학 산하의 '건축공학과'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 이름에 걸맞게 대부분의 우리 과 4학년들은 시공, 구조 등의 공학분야 전공을 살려 사회진출을 고민했다. 확실히 그쪽은 이미 사회에 진출해 뿌리를 내린 선배들도 많았고 교수님들도 여러 명으로 층이 두터웠다. 그래서인지 왠지 기회도 많아 보였다. 반면 나는 처음부터 굳이 '건축 설계'를 고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딘가 무서워 보이는 선배들의 기에 눌리고 주눅 든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치열한 경쟁에서 공부로 살아남아 좋은 학점을 딸 자신이 없어서였다. 이래저래 20대 초반의 나에겐 그저 ‘건축설계', 그 길이 더 매력적이었다.
어찌 됐건 학과의 정식 명칭이 '건축공학과'인 만큼 ‘건축 설계'를 전공하겠다는 학과생들은 각자 알아서 살길을 찾아가는 모양새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선배들은 스스로 스터디 모임을 만들기도 하고, 자신에게 맞는 공모전을 찾아 방학 내내 몰두하기도 하는 등 저마다 바쁜 모양새로 전공에 몰두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도서관에 관련 책도 많이 부족했고 '어떤 자료를 어디서 찾아서 무엇을 들여다봐야 할까'라는 식의 원초적인 고민들을 많이 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모두들 각자의 열정으로 각자의 고민들에 깊게 몰두해 있었다.
나와 1살 차이 나던 B선배는 절박해 보이는 상황들과 어딘가 분위기가 달랐다. '각자도생'의 분위기 때문에 비장하기까지 한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 선배는 좀 여유가 있어 보였달까. 살짝 머금고 다니는 옅은 미소도 그랬고 말끔한 행색도 그랬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선배의 작업들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생각들이 참 많았다. 신선하기도 하고 멋져 보이고 심지어 그럴싸해 보이기까지 하는 작업들. 나는 그 선배를 그렇게 기억한다.
나와 그 선배는 같은 해에 졸업을 했다. 그 형도, 나도 복학생들로서는 그리 늦은 것도 빠른 것도 아닌 졸업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해에 우리 과에서 한 70명 정도가 졸업한 것 같은데 그중에 10명 남짓한 인원이 설계 분야로 진로를 정했다. 그중 6-7명 정도는 몇백 명이 함께 일하는 대형 설계사무실로 향했고 두어 명이 유학길에 올랐으며 나를 포함한 나머지 두어 명이 10명 이하의 설계사무실로 향했다. 그중에 B선배는 초봉이 가장 센 대형 설계사무실로 갔다.
그 뒤로 시간이 얼마 지나 그 형의 소식을 들었다. 치과전문대학원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 선배와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많이 아쉬웠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아쉬움 속에 ‘왜 그랬을까’을 되뇌었다. 그렇게 혼란스러워진 데에는 ‘치과전문대학원’이라는 명칭과 하나도 친하지 않았던 탓이 크다. 그의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런 선택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등등 수많은 부차적인 질문들을 떠올려야 했지만 당시 나는 그런 질문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잘 모르고 무지했기 때문도 있지만 그저 하루하루 출퇴근에 꽉 차 있는 내 일상을 소화하기는 것도 당시 나는 벅찼다.
수년 동안 공부한 전공을 뒤로한 그를 보며, ‘나는 제대로 선택을 한 것일까'라는 알 수 없는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너무 깊게 빠져있어 줄곧 모든 걸 잊어버렸다. 더 정확하게는, 그 불길한 생각이 들긴 했으나 그렇다고 당장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일까라고 생각이 들어도 그럼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을 줄도 몰랐다. 그저 내가 어찌어찌 선택할 이 길이, 이 직업이 나에게 맞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 근무환경이 좋은 편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이 길이 훨씬 보람 있고 멋져 보인다고 믿었다. 그렇게 애매하게 지나버린 시간도 기억 저 멀리서 희미해져 간다.
당시 나는 당연스럽게 ‘직업’은 오직 하나라는 생각을 했다. 사회 상황에 받은 영향도 있겠지만 여러 가지 멀티 직업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 나이가 지금 부모님의 나이가 될 때쯤, 기대수명은 더 길어진다고 하던데(물론 지금과 같은 역병의 시대가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보면 '단 하나의 직업'으로 나를 규정짓는 것은 너무 섣부른 것일까. 어디서 보아하니 취미를 직업으로 발전시킨 사람도 있다던데, 그 형처럼은 아니어도 아예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