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베를린 부부-chicken
어릴 적부터 김치를 막 잘 먹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 것 같다. 집에서 어머니가 준비해주시는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던 시절, 반찬통에 넣어주신 어머니의 김치를 외면하기도 했다. 시큼한 신 김치가 별로였다. 마침 맨 앞 줄에 앉아 있던 내가 김치를 건드리지도 않고 반찬 뚜껑을 덮으려는 찰나, 담임선생님이 “쓰읍-!”하시며 아랫입술을 잘근 무시고 먹기 싫어도 하나 먹으라고 다그치셨다. 어린 시절 김치에 대한 나의 기억은 그 정도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김치를 꽤 좋아하게 됐는데 계기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부모님이 싫어하실 것 같은 이유가 하나 있는데 그건 아마 성인이 되어 음주를 시작하면서부터 일 것이다. 술안주로 곁들이는 김치가 맛있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사춘기 이후로 고기를 꽤나 좋아하게 됐는데 보쌈이나 족발에 곁들여 먹는 겉절이의 상큼한 맛에 매료되면서 본격적인 김치인에 된 것 같다. 아, 물론 명동교자도 빠질 수 없다. 배추에 양념을 절인 게 아니라 양념에 배추를 넣었다 뺀 것 같은 진한 겉절이 김치를 아주 좋아한다. 이렇게 요리들에 얽힌 김치 추억들은 꽤나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김치 맛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대학을 다니면서는 학교 근처에서 대부분의 끼니를 해결했고, 직장을 다니면서는 점심 저녁에 야식까지 밖에서 끼니를 해결했으며 마드리드에 나오면서부터는 먹고 싶어도 못 먹게 됐다. 중고등학교 시절 김치를 좋아했다면 나름 김치에 대한 디폴트 값이 있었을 텐데 난 그게 없는 모양이다. 스페인에 나오게 되면서 오이 무침 등 어딘가 부족하지만 그래도 비슷할 수 있는 대체제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대체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저 빈자리를 대신하는 것 정도이다.
한 번씩 한국에 갈 때마다 부모님이 가장 먼저 물어보시는 것 중에 하나가 음식이다. ‘뭐가 제일 먹고 싶냐’고 물어보시는 두 분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삐져나오는 메뉴들이 있었다. 보통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먹기 힘든 음식들, 구할 수 없는 재료들로 만든 음식들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그 밑천도 머지않아 바닥을 드러냈다. 그래 봐야 1년에 한 번 정도 먹는 음식에 의미를 찾기는 더 힘들어졌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그 순간은 너무 짧았기 때문이다. 길어봐야 몇 주 한국에 머무는 동안 허겁지겁 맛보는 음식들에 대한 기억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의 음식에 대한 기억은 머릿속 어느 곳에 항상 있게는 했다. 혼자 끼니를 해결하려 부엌에서 시간을 보낼 때마다 이맛인가 저 맛인가 가물가물 할 땐 관성적으로 어머니의 맛으로 따라가곤 했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살았어도 여전히 전화찬스는 항상 있었다. 내가 어떤 맛을 찾고 있는지 신기하게도 어머니는 알고 계셨다. 이런 일로 내가 전화를 할 때면 어머니는 신이 나서 이것저것 일러주시곤 했다.
결혼을 하고 성인 2명이 함께 살면서 입맛은 다시 한번 천천히 바뀌어 가고 있다. 우리 부부는 좋아하는 음식도 다르고 음식취향도 다르다. 하긴, 그게 어떻게 같을 수 있겠냐만. 어쨌거나 나는 오랜 자취 생활로 간단하고 편하게 후딱 먹을 수 있는 식사를 지향하는 반면 그녀는 ‘저 귀찮은 걸 어떻게 하지’라는 것을 해낸다. 그런 그녀가 만든 김치도 이제는 내 입맛이 되어 가고 있다. 아마도 우리가 한국에 살았다면 어머님들의 김치를 번갈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있겠지만 우리의 현재는 그렇지 않다. 그녀의 김치가 우리 집의 한국사람에겐 전부이다. 김치를 하는 날엔 으레 겉절이를 먹곤 했는데 이제 그건 머나먼 이야기다. 그래도 그렇게 정성스레 아내가 담가준 김치로 식탁은 항상 풍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