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를린부부 Dec 16. 2024

두 번의 스위스 건축 공모전

건물이 나이를 먹는 속도는 사람보다 훨씬 더디다. 유럽의 건물들은 보통 몇 세대를 넘어 그 자리에 서 있으니, 내가 떠난 뒤에도 한참이나 더 그곳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건물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으며 추억이 되고, 일상의 배경이 되어간다. 시간의 흔적을 빼곡히 담은 유럽 도시들의 공공건물들은 그렇기에 보통 공모 과정을 통해 발주한다.


장소, 프로그램, 의도, 환경, 규모 등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만큼 다양한 건축 공모전들은 전 세계 건축가들이 먹고살기 위한 중요한 수단 중 하나이다. 본질적으로 계속 경쟁하고 도전하며 시도해야 하는 공모전은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모험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더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그 치열함으로 나의 30대를 채워준 두 공모전이 있다. 스위스 로잔 주립 미술관 공모전과 스위스 쿠어 미술관 공모전이다.


바르셀로나에 살던 30대 초반의 나는 열정만 가득한 사람이었다. 감히 누구도 “어떻게 다듬어져야 할까”라는 말을 꺼내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답답한 일상을 뒤로하고 낯선 스페인으로 떠났지만, 뭐 하나 손에 잡히거나 풀리는 일이 없었다. 비자를 받는 일도, 한 달 벌이로 살아가는 일도 도통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렇기에 몇 년 만에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된 바르셀로나의 작은 사무실은 단순히 생계만을 위한 직장이 아니었다. 그곳은 내가 살아있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은 장소였을지도 모른다. 일할 장소와 대상을 오래 갈망했으니 근로계약이 없는 건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삶의 무언가가 보장되는 게 아닌 매달이 생존이었고, 그래서 나의 마음이 급한 만큼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치였을 것이다.


첫 출근과 동시에 시작된 공모전은 내가 유럽에서 처음으로 경험한 공식 공모전이었다. 스위스 로잔 중앙역 근처 대규모 철도 차량기지를 문화단지로 재개발하기 위한 이 공모전은, 2011년 당시 유럽 건축계를 들썩이게 했다. 내로라하는 유럽과 미국의 거장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바르셀로나 출신의 이름 없는 젊은 건축가 듀오도 참가하게 됐다. 나는 그 팀의 일원이었다.


스위스는 이전에 잠깐 들른 적은 있었지만, 제대로 방문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팀과의 소통은 영어와 스페인어를 뒤섞어 사용해야 했으니 더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말보다는 시각적인 자료를 통해 소통하려 애썼다. 매일의 대화 속에서 펜 하나도 없이 빈손으로 오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는 도면, 스케치, 모형, 3D 모델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내 생각을 전달해야 했다. 당시 나에게 비언어적 소통은 유일한 기술이자 수단이었다.


수없이 오가는 아이디어들을 확인하고 정리하면서도, 내 의견과 생각을 담아내야 했다. 자연스레 근무 시간이 길어지고, 집에 와서도 쉬지 못했다. 그렇게 몸은 늘 바빴고, 정신은 한시도 쉬지 못했다. 일이 많아 고되었지만, 우리의 공모전이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느껴지는 성취감은 그 모든 것을 보상해 주는 듯했다.


직원들 사이의 신경전도 물론 있었다. 결국 제출할 안은 단 하나이니, 모두가 더 치열하게, 더 열심히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그중 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러나 천재에 가까운 이탈리아인 소장은 늘 예상치 못한 아이디어를 들고 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우리가 머리를 싸매고 고심한 아이디어도 그의 기발함 앞에서는 빛이 바랬다.


그럴 때면 밤에 잠자리에 누워서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왜 저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과 되새김질에 한동안 갇히곤 했다. 하지만 그런 고민도 오래가지 않았다. 마감이 가까워질수록 일정은 더 바빠졌고,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숨 가쁘게 앞으로 나아갔다.


같은 해 겨울에 있었던 스위스 쿠어 공모전도 비슷한 과정이었다. 다행히 크지 않은 규모에 일의 양에 많지는 않았지만 모두 쏟아내는 에너지는 그대로였다. 로잔 공모전을 통해 당선이 될 수도 있다는 학습이 되어 버린 탓이었다. 치열한 토론과 논쟁은 매일매일 계속되었다. 그렇게 두 공모전으로 2011년이 끝나가고 있었다.


당시엔 몰랐다. 살면서 이 정도 규모의 미술관 설계 과정을 경험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기회인지. 한 해에 발주된 스위스에 지어지는 2개의 주립 미술관을 스페인의 작은 사무실이 연달아 수주한다는 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그리고 그 정도 대규모 문화시설은 아무 때나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제로 난 그 뒤로 꽤 오랫동안 문화시설 설계에 참여하거나 경험하지 못했다.


두 미술관은 공모전이 발주된 지도, 작업한 지도, 완공된 지도 벌써 수년이 흘렀다. 고맙게도 완공식에 초대받았지만, 로잔 때도, 쿠어 때도 나는 가지 못했다. 계단실 몇 밀리미터 차이를 두고 수없이 도면을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했던 기억, 공모전 때부터 끊임없이 반복했던 렌더링 작업들이 무색하게도 두 건물이 도시의 현실로 자리 잡은 모습을 나는 일상에 치어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무리해서라도 가족여행으로 스위스로 가려 애썼다. 아무리 바쁘고 돈이 없더라도, 왠지 이 두 건물을 직접 보지 않으면 유럽에서의 시간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기능으로 가득한 게 아닌, 시적인 비유와 여유로 가득한 공간도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단 1cm도 경제적 논리로 지배받는 건물에 둘러싸여 있을 때 몰랐다. 그렇지 않은 건물이 있듯이, 내 일상에도 그렇지 않은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어렴풋해진 그때의 기억이 건물을 마주하자 바로 살아났다. 오랜만에 마주한, 예전에 자주 타던 내 자전거를 탄 것처럼, 너무 익숙하지만 너무 어색했다. 그리곤 이내 지금 나의 현재에 어떻게 임해야 하는지를 되뇌게 한다. 그때의 경험은 건축 공모전에 대한 나만의 기준이 되었다. 그 산만하고 꿈만 같았던 몇 년은 내가 현재 살아가는 일상의 자양분이 되었다.


5살 첫째는 이제 제법 같이 여행할 맛이 나지만, 1살 둘째는 아직 ‘모시고’ 다녀야 하기에 체력적으로 우리 부부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 너무 짧았고, 바쁘게 움직여 더 힘들었던 우리 가족의 스위스 여행은 높은 난이도였지만, 아마도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여행을 통해 나의 30대가 고스란히 떠오른다는 점이 감사하다. 바르셀로나를 떠나 베를린에서 사는 동안 너무 잊고 살았던 열정, 건축의 아름다움. 그 모든 것을 낭만적이고 사치스럽게라도 다시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 너무 좋다.


MCBA(Musée cantonal des beaux‑art)-건물은 오른쪽 기찻길과 왼쪽 도시의 끝자락 경계를 만들고, 사잇공간은 도시의 연속인 문화공간으로 변모했다.
MCBA(Musée cantonal des beaux‑art)-이 자리에 원래 있었던 기차 수리 공간의 오래된 기하학이 입구 홀 공간의 부분으로 남아있다.
BKM(Bündner Kunstmuseum Chur)-많은 개구부가 필요없는 건물의 입면은 50cm 작은 요소의 반복으로 채워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