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에 베를린으로 이직한 뒤, 귀국 전까지 나는 줄곧 베를린에서만 살았다. 특정 대학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간 것도 아니었고, 베를린을 떠날 이유도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그곳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가 두 번째로 뿌리를 내린 도시가 된 것이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한 명, 두 명 태어나고 점차 자라면서 우리의 뿌리는 더욱 깊어졌다. 베를린은 이제 나만의 도시가 아니라 우리 가족의 터전이 되었다. 직장은 물론 가족 모두의 친구들, 그리고 일상 속에서 부대끼며 이어진 인연들까지 모든 것이 베를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서울이 내 첫 번째 고향이라면, 베를린은 삶의 새로운 무대이자 우리 가족의 또 다른 고향이 되었다.
지난 6월 실직한 이후, 나는 줄곧 베를린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왔다. 별다른 의심 없이 베를린이 앞으로도 내 일상의 배경이 될 것이라 믿었다. 단지 새로운 직장만 구해 다시 대입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베를린의 첫 직장에서 9년 넘게 안정적으로 일하며 얻은 자신감과 익숙함 때문일 것이다. 마음 한구석에는 늘 ‘언제든 내가 원하면 뭔가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건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내가 이 도시에서 쌓아온 시간과 경험이 주는 애착이었다.
일상의 큰 변화를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있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결단이 아니라, 아주 작은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큰 결정을 이끌어내는, 느리지만 꾸준히 흘러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나는 열심히 이 회사 저 회사에 지원서를 넣으며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과정 속에서 자잘하고 하찮아 보이지만 묘하게 기억에 남는 순간들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취업에 대해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직장에 나가지 않아도 하루는 여전히 바쁘게 흘러갔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아주 서서히 우리 가족이 앞으로 베를린을 떠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번에 내려진 결론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는 내적인 과정을 거치며 생긴 마음가짐이었다.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던 아내도 아마 은연중에 이런 변화를 느꼈을 것이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녀와는 이렇게 생각이 통할 때가 많았다. 가족 중 어른인 우리 두 사람은 혹시 모를 일상의 변화를 대비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예민하게 상황을 살폈지만, 우리 아이들은 여전히 별다른 변화 없이 꾸준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확실한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아이들에게 함구할 생각이었다. 특히, 갓난아기보다 유치원생인 첫째 아이를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즈음 마주한 구인 광고들은 대부분 베를린이 아닌 다른 도시들에 위치한 사무실들이었다. 자본의 규모나 경제 흐름을 봤을 때, 베를린보다 이 불황의 시기를 상대적으로 잘 견뎌내는 부유한 독일 도시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의 변화를 최소화하고자 처음에는 베를린 지역만을 대상으로 구직 활동을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반경을 크게 넓혀야 했다. 간신히 몇 차례 연결된 베를린 내 사무실들과는 주로 임금 협상 단계에서 협의가 결렬되기 일쑤였다. 결국 나는 하나둘씩 베를린 외 도시들로 지원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의구심 속에서 주저주저하며 적던 희망 임금을 과감히 높게 적어보기도 하고, 베를린과 동일하게 적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몇 주 사이, 몇 개의 인터뷰가 잡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슈투트가르트가 갑자기 물망에 올랐다. 독일 남부의 주요 도시들인 뮌헨이나 프랑크푸르트는 짧게나마 방문해 볼 것을 권유받은 적이 있었지만, 슈투트가르트는 그저 생소하기만 한 도시였다. 솔직히 말해, 이 도시가 메르체데스의 고향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이 시점에 나는 슈투트가르트에 위치한 두 곳의 사무실과 면접을 진행 중이었다. 다행히 한 곳은 온라인 면접으로 이루어졌지만, 다른 한 곳은 원칙적으로 대면 면접을 고집했다. "그래, 이참에 안 가본 도시 구경도 할 겸 가보자." 그렇게 마음먹고 슈투트가르트를 향할 준비를 시작했다. 어차피 유치원 방학에 맞춰 아이도 집에 있으니 자연스레 가족여행이 되었다.
슈투트가르트는 독일 남부 바덴뷔르템베르크(Baden-Württemberg) 주의 주도이자 최대 도시로, 독일에서 여섯 번째로 큰 대도시이다. 대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춘 슈투트가르트는 무엇보다 산악 지형이 가장 인상 깊었다. 평평한 지형의 베를린에서 오래 살았던 탓에, 언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환경에 익숙했던 내가 서울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지형을 다시 마주하니 흥미롭고 신선하게 느껴졌다. 특히 슈투트가르트는 독일 대도시에서는 드물게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를 하고 있어, 도심 진입 시 교통체증이 다소 있는 편이다. 한국의 대관령처럼 산을 관통하는 터널로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결국 문화와 환경에 따른 멘탈리티의 차이처럼 보였다. 시내 곳곳을 지나는 지하철이 산과 언덕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며 도시를 가로지르는 모습은 슈투트가르트만의 독특한 매력을 더해 주었다. 이 도시의 풍경은 베를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색다른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유난히 더웠던 그해의 기온 때문인지, 내리쬐는 햇살 속의 슈투트가르트 구도심은 더욱 '유럽스럽게' 느껴졌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풍경과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건물들은, 역사를 품은 구도심의 정취를 완벽히 드러내 주었다. 특히 좁은 거리 사이로 새롭게 자리 잡은 편의시설과 문화시설은 눈길을 사로잡았다. "어떻게 이런 공간에서 공사를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치 외계인이 작업한 것 같은 기묘한 조화를 보여주었다. 오래된 것들과 새로운 것들이 공존하는 모습, 그리고 과거를 보존하면서도 재해석하는 방식은 이 도시만의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유럽스러운' 도시에선 충족감을 느끼는 동시에, 자연스레 질문과 사색이 많아진다. 이 조화로움 속에서 나는 단순한 구경 이상의 것을 경험하는 듯했다.
베를린에서 슈투트가르트는 꽤 먼 장거리 이동이었다. 우리 가족은 차로 이동했는데, 편도로 약 600킬로미터 거리였다. 어른들만 이동해도 6~7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아이들과 함께라면 사실상 반나절 내내 이동에 시간을 쏟아야 하는 셈이었다. 다행히 아이들이 잘 견뎌 주어서 큰 어려움 없이 다녀올 수 있었다.
독일 고속도로 휴게소는 규모나 편의성을 봤을 때, 딱 필요한 기능만 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특별히 머무는 즐거움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흥미롭게도 휴게소마다 야외 놀이터는 잘 마련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있는 가족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이동 중 우리는 종종 휴게소에 들러 잠시 멈춰 아이들을 놀리고 다시 차를 몰고 몇 시간을 달리는 식으로 여행했다. 놀이터에서 잠깐 뛰어노는 우리 아이들과 함께 놀던 다른 아이들도 아마 비슷한 여정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짧은 시간 동안 도시를 둘러보며 틈틈이 면접도 봤다. 슈투트가르트 첫 방문에서 가장 기대했던 곳 중 하나는 바로 건축가 이은영 씨가 설계한 슈투트가르트 주립 도서관이었다. 오래전부터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이곳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도서관 내부는 어린이 코너가 특히 잘 마련되어 있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에 매우 수월했다. 도서관 바로 앞 광장에는 수변 놀이터까지 있어, 도심 속에서도 가족이 편안히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원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새롭게 지어진 이 도서관은 외관에 한글 사인이 있어 반가웠고, 어린이 도서 코너에는 한국어 동화책도 제법 구비되어 있었다. 우리 가족처럼 한국어를 사용하는 어린아이들과 함께 방문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을 듯했다.
도서관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뒤편에는 멋진 카페도 자리하고 있었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즐기는 동안,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구경하러 왔다는 인상을 받았다. 건물 곳곳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 모두, 이 특별한 건물을 직접 보기 위해 방문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각자 다른 사연과 시간 속에서 이곳에 도착했겠지만, 모두가 이곳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경험하려는 공통의 마음을 갖고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여름 나들이는 서서히 저물어 갔다. 아쉽게도 그 도시와는 더 깊은 인연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따스한 햇살 속에서 반짝이던 슈투트가르트의 모습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 풍요로운 먹거리, 풍부한 문화적 유산, 그리고 도시 곳곳에 느껴지는 넉넉함까지,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돌아오는 길, 우리 부부는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주고받았다.
“여기에 살려면 살 수 있겠어?”
우리는 망설임 없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