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베를린에서 재택근무는 통상적인 개념이 되었다. 이직하거나 처우협의를 할 때 빠지지 않는 개념이 되었고, 사내에서 뿐 아니라 외부업체와도 화상회의 및 재택근무의 방식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 판데믹 사태를 통한 전방위적인 훈련으로 어느 누군가가 집에서 일을 한다고 업무적으로 불편해하거나 번거롭게 느끼지 않는다. 그 나름의 리듬대로 각자의 일을 하고, 상황에 맞춰나간다.
처음 강제 재택근무가 강제 실시되던 날을 기억한다. 2020년 4월, 길고 긴 베를린의 겨울이 지나고 화창한 봄이 되어 해가 눈에 띄게 길어지는 여느 평안한 날씨였다. 2019년 말부터 한국에서는 이미 사람들이 마스크를 열심히 쓰기 시작했고 감염 경로를 파악하는 등 코로나와 관련해 여러 가지 뉴스들이 매일매일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양성반응이 상륙하게 전 베를린은 코로나에 대한 반응이 극렬하게 나뉘었다. 심각하게 생각하기는커녕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소동’쯤으로 치부됐다.
평안을 유지하려, 동요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사실 아슬아슬 살얼음 같던 날들이었다. 집에 어린아이가 있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늘 조심했다. 되도록 사람 많은 곳에서만이라도 마스크를 착용했다. 어쨌거나 마스크를 쓰면 썼다고, 안 쓰면 안 쓴다고, 아시아 사람이라고 매일 같이 눈치 보던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하드-락다운(전면 봉쇄조치)“이 강제시행되었다. 그날 역시 출근길에 오를 때만 해도 어찌어찌 하루가 지나갈 것이라 소망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전체메일로 전원 재택근무 할 것을 전달받은 나와 같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집으로 향했다.
우리 집 역시, 세 식구 모두가 집에 갇혀버렸다. 모두가 강제로 격리된 그즈음, 아마도 이때부터 뒤늦은 독일의 디지털 혁명이 시작된 것 간다. 유난히 현금을 선호하고, 신용카드보다 체크카드를 선호하며, 모든 중요한 문서는 출력물과 실질서명이 필요한 문화가 물리적인 제한을 만나 진화하기 시작했다. 배달서비스, 전자동의, 전자결제, 인터넷 예약문화 등이 속속 등장했다. 나 역시 원격으로 집에서 일하며, 화상으로 통화하며, 부지런히 스케치를 스캔하고, 화면을 공유하며, 모든 업무 내용을 그 가느다란 랜선에 담아, 와이파이에 담아 나누었다.
디지털 변환의 천문학적인 사회비용과는 달리, 뜻하지 않게 서로를 염려하고, 어느 때보다 인류애가 강해진 시기이기도 했다. 메신저로, 화상통화로, 한 번도 따로 이야기해 본 적 없는 동료와 서로를 염려하기도 했다. 저녁때는 수고에 여념 없는 의료진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창문에 기대어 박수를 보내기도 하고, 성원에 응원을 더해 기부를 하기도 했다. 텅 빈 도시를 누비는 드론의 영상이 급부상하며 우리가 사는 대도시가 멈추는 광경을, 영화와 같은 장면에 많이도 공감했다.
한창 유치원과 놀이터를 다니던 아이는 하루 종일 집에서 답답해했다. 아이의 감정변화는 우리 부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판데믹 상황을 이해할리 없는 12개월 아이에게 집에 하루 종일 있는 시간은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매일같이 밖에서 뛰어놀던 아이가 이해하기에는 사회적 상황이 너무 극적이었다. 순간을 멀다 하고 놀아달라는 아이와 온 가족이 집에만 머무르며 곱절로 늘어난 집안일에 우리 부부는 참 많이도 다퉜다.
판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봄, 우리 가족은 한국에 몇 달간 머물렀다. 마스크 착용에 대한 거부감으로 독일의 확진자 수는 큰 낙폭으로 오르락내리락했고, 자유를 외치며 거부한 마스크로 인해 도리어 구속받았다. 유치원도 학교도 직장도 그 어느 곳도 자유롭게 갈 수 없었다. 대중교통도 마찬가지로 사용자제를 권고받았으니, 그냥 집에만 있으라는 뜻이었다. 락다운 조치는 당시 독일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마스크 열심히 쓰는 일상생활을 탐하기 위해 한국행을 결심했다.
비행도, 자가격리도, 입국도, 24개월이 된 아이와 함께 쉬운 게 하나 없었지만 그래도 자가격리 후의 자유로움을 기억한다. 답답했던 만큼 너무나 후련했다. 그렇게 어릴 적 공상과학 영화에서만 보던, 그래서 불가능할 것 같던, ‘인터넷만 있으면 근무가능한’ 세상이 도래했다. 나도 그렇게 서울에서 베를린 시간으로 일을 하고, 아이는 집 근처 어린이집에 마스크를 쓰고 가고, 마스크를 쓰고 가족들과 만났다. 그 해, 마스크 너머로 봄 햇살과 날씨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판데믹 이후 재택근무는 일상의 일부분이 되었다. 대부분 직장에서는 일주일에 1-2일 정도의 재택근무는 기본 근무 형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 재택근무를 활용하는 방법도, 그나마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것도 모두의 경험이 되었다. 겨울마다 대유행하는 독감으로 아이의 유치원이 며칠씩 문을 닫아도, 그 사이에 내가 재택근무로 집에 머물러도 코로나 시절처럼 짜증이나 화가 나지 않는다. ‘그러려니’ 할 뿐, 이미 한계치에 다다른 외부 스트레스에 내가 보태봐야 그건 독이 될 뿐이다.
생존과 뜻하지 않게 너무 가까웠던 몇 년을 지나 일상의 한 부분처럼 다시 적응이 되고 느꼈던 그 안도와 희열이 아직도 선명하다. 다시 마스크 없이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려 바깥 활동을 하고, 더 이상 마스크를 착용하는 게 이상하지 않고, 가물가물한 기억에서처럼 타인과 가볍게 대화할 수 있는 안정감. 놀이터에 마음껏 뛰노는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말을 띄는 어른들도. 당연하게 생각되는 일상을 빼앗겨보고 나니 그 소중함이 더 간절하다.
각자의 상황이 있고, 각자의 결정이 있다. 과연 어디까지가 개인의 영역인지 분명하게 각인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판데믹 전과 후의 가장 큰 변화는 ‘그럴 수도 있다’라는 자가인정이 아닐까. 양성일수도, 음성일 수도 있다. 백신을 맞았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저 그 상태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 내가 생각한 상식들이 뒤집어지는 과정들을 보며 조금 더 겸손해지고 숙연해졌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