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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린부부 Nov 18. 2024

일상, 그리고 출퇴근

2024년 10월. 한국의 가을 날씨는 맑고 맑다. 깨끗하고 또렷한 도시의 여러 모습을 시종일관 보여주는 서울의 하늘은 가을의 따스하고 여유로운 햇살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다. 약 10년간의 베를린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우리 가족은 새로운 시차에 열심히 적응 중이다.


언제나처럼 직항이 없는 베를린-서울 구간은 여행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특히 14개월이 갓 지난 둘째에겐 더 그랬을 것이다. 그렇기에 인천공항에 착륙한다는 기내방송은 언제나 반갑지만, 마지막 귀국이라 특히나 많은 짐을 날라야 하는 이번 여정은 떡진 머리, 땀 냄새보다 더 신경 쓸게 많았다.


베를린의 일상은 2014년 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난 10년, 베를린과 보낸 일상은 줄곧 균일했다. 매일의 출퇴근도, 사무실의 업무도, 주말의 풍경도. 대도시 어디나 그렇듯 크고 작은 일들은 있었지만, 작은 톱니바퀴 중 하나인 나에겐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이 큰 도시에 있는 느린 변화들보다 내 신변의 변화가 급격했다. 많지 않던 크고 작은 톱니바퀴가 하나둘씩 늘어가며 신경 쓰지 못하는 부분이 생기고, 새롭게 무언가 추가될 때 ‘이게 괜찮을까’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도 있었다.


베를린의 뚜렷한 사계절은 늘 균일했다. 화창하고 반짝이며 선선하기까지 한 여름은 매년 기대를 더하게 만들었다. 길고 긴 여름 햇살은 퇴근하고도 낮시간에 남은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해가 짧아 저녁이 길어지는 마법을 부리는 겨울 역시 함박눈이 내려 폭신해진 거리처럼 다음 발걸음을 기다리게 했다. 해가 거듭될수록 계절에 대해 더 알게 되고, 할 수 있는 영역도 넓어지며, 이 도시와 계절이 묵묵히 내어주는 고마운 환경을 낭만이 가득한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다.


무슨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을까 싶은 날들을 지나 2018년 결혼했다. 베를린에 안착하게 된 과정과 비슷하게 전혀 예상치 못한 인연으로. 서울과 베를린을 오가며 1년 반 동안의 장거리 연예는 성인 두 명의 매일의 일상을 고스란히 지켜줬고, 그렇기에 무사히 결혼할 수 있었다. 여느 다른 연인들처럼 자주 만났으면 어땠을까, 우리 부부는 아직도 키득키득 농담한다. 그게 베를린 생활의 2막이었다.


결혼과 함께 바로 시작된 육아는 모든 게 더 새로웠다. 한국에서 스페인으로, 스페인에서 독일로 일상의 배경이 바뀐 것만큼이나 급격한 삶의 변화였다. 혼자 살기에 조금 넉넉했던 공간은 늘어난 식구들로 복작였다. 갈수록 온기를 더해갔지만 살림이 늘어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비좁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늘 캄캄했던 퇴근 후 시간은 누군가와 오늘의 일상에 대해 한국말로 나누는 소소함으로 따뜻했다. 본격 육아가 시작되며 그나마도 매 순간 시간과의 싸움이 되기 일쑤였다. 느린 듯 빠른 매일매일은 일주일, 한 달이나 지나 밖에서 느끼는 계절의 변화로 시간을 알려줬다.


우리 가족의 거주지인 독일은 다사다난하지만 꾸준하게 안정감을 이어가고 있었다. 여느 나라들처럼 여러 가지 사안들이 있고 이슈들이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독일은 완만한 그래프에 안착해 있었다. 그렇기에 건설경기도 활발했고, 그렇기에 건축적인 생각들도 치열하고 활기찼다. 매일매일 새로운 공모전들이 쏟아져 나오고, 신선한 생각들과 새로운 인물들이 꾸준히 등장했다. 치열한 건축 공모전 역시, ‘해볼 만한 게임’이었다.


그 후 첫째가 태어날 그즈음, 나는 독일 영주권을 받았다. 마침 아이의 출생과 맞물려 독일 정착에 대해 이보다 더 확실한 계기는 없었다. 그저 아이를 ‘베를리너킨트‘로 키우면 됐다. 혼자 살 때 몰랐던 혜택들과, 부모가 되며 접한 육아의 세상은 달랐다. 여러 가지 이해가지 않는 부분에 납득을 하기도 하고, 복지혜택에 안도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도 다른 집들처럼 우리도 ’ 아이 키우는 집‘으로 바르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자연스레 아이 키우는 집들과 교류가 많아지고 저녁시간에는 늘 아이를 재우고 사부작사부작 하루를 마치는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독일 영주권은 나에게 큰 성취감과 안정감이었다. 그 사회가 바라는 사회구성원의 모습에 도달했다는 성취감. 체류비자 때문으로 인해 아찔한 순간을 가족이 겪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여태까지 그랬듯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삶에 대한 확신까지 들었다. 타석에 여러 번 들어서면 기회가 많아지듯 일도 많이 했지만 그만큼 모든 성과도 좋았다. 내 개인도, 우리 팀도, 우리 사무실도, 이 도시도. 건축적 성장이나 깊이에 대한 탐구보다 여러 다양한 장소에 부지런히 프로젝트를 하는 일상으로 독일을 배워갔다.


이 수많은 시간을 뒤로하고 우리가 한국에 ‘아예‘ 귀국을 했다는 실감은 아직도 느끼지 못한다. 언제나처럼 한 달 정도 들렀다 베를린으로 돌아갈 것만 같다. 지인의 말처럼 언젠가 문득 뼈저리게 그 시절이 그리워질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현재 배경이 서울이라는 것뿐, 타지에 적응하는 것은 언제나 녹록지 않다. 멀리 여행 가서 며칠 만에 김치를 찾았다는 부모님의 여행 후기를 들으며 우리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한국말을 이해하고 소통이 가능한 것 외에 모두 적응해야 하는 지금을 몸과 마음 건강하게 지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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