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 15분. 플랫폼으로 열차가 들어온다. 올해 주야장천 파업을 하더니 그래도 운행간격이 일정해진 에스반(S-Bahn, 독일의 철도사에서 운영하는 국철)을 타고 출근길에 오른다. 보통은 30분 정도를 타고 시내로 이동한 뒤 몇 정거장 전에 내려 살짝 걷는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직업 탓도 있지만 지금 다니고 있는 사무실의 너무 좋은 위치 때문이다. 작년 여름부터 다녔던 이 사무실은 베를린의 시내 중에 시내에 위치한다. 그래서 매일 출근길에 관광객들이 주로 다닐만한 길을 지난다. 그래서 가끔씩 발걸음을 멈추고 관광객처럼 사진을 찍기도 한다.
작년 6월, 베를린에서 첫 이직을 했다. 내가 베를린에 온 게 2014년이었으니, 9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한 사무실에서 일을 했다. 한 조직에 오래 있으면 다른 곳으로 움직이기 힘들다고 하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 가고 싶었던 사무실이기도 했고, 마침 한국과 관련된 일들로 한국 사람을 찾는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 때문이었다. 유럽에 머무는 동안 한국성과 멀리 유럽 스러운 것만 추구하려고 애쓴 탓에 전혀 상상해보지 못한 특별한 '니즈'였다. 9년이 넘는 시간 동안의 일상이 주는 모든 따뜻함과 안정감을 뒤로하고, 이직해야 할 이유는 사실 그걸로 충분했다.
몇 년 전 서울 용산에 완공된 아모레퍼시픽 본사 건물로도 알려진 데이비드 치퍼필드 아키텍츠 (David Chipperfield Architects)는 1985년 런던에서 시작해 2024년 현재 런던, 베를린, 밀라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상하이에 지사를 두고 있는 사무실이다. 오랜 시간 동안 여러 다양한 작업을 한 이 사무실은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일해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작은 스케일의 인테리어 작업부터, 전 세계 곳곳에 지어진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등, 학부시절부터 관련 서적을 보며 열심히 따라 해 보기도 하고, 열심히 들여다보기도 하며 동경해 온 작업들이 많다.
작년인 2023년 이른 봄이었다. 뜬금없이 이 사무실에서 메일이 왔다. 아직도 이직에 관심이 있으면 한 번 만나보자는 메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코로나 3년 차였던 2022년 2월에 마지막으로 지원서를 보냈던 기록을 찾았다. 평소에 관심이 많은 사무실은 주기적으로 지원서를 보내곤 했었다. 지원 절차를 마치면 '귀하의 자료를 면밀히 살펴보고 연락하겠다'는 친절한 메시지뿐이었다. 그 뒤로 나조차도 새까맣게 잊어버렸던 그 지원서에 답장에 온 것이다. 시간이 1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지원서를 보관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갑자기 이직에 대한 관련 주제들이 머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가족과 상의를 하고 무엇보다 퇴직 관련 처리를 서둘러야 했다. 이미 정해진 일정에 맞추기 위해 업무날짜가 불가피하게 살짝 겹쳐야 했기 때문이다. 행정처리보다 사실 알듯 말듯한 불안감이 더 걱정됐다. 가족단위가 커진 뒤로 겪는 첫 번째 이직이었기에, 가장으로서 굳이 안정된 길을 놔두고 이 길을 택하는 게 맞을까. 몇 달 있으면 태어날 예정이었던 둘째의 출산도 그랬다. 아내는 괜찮다고, 이해한다고 했지만 심적은 부담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이내 곧 열망이 모든 염려를 잠재웠다.
2023년 6월에 입사해 그 해 연말까지가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회사도 회사지만, 그 해 여름 태어난 둘째 아이도, 그로 인해 오랜만에 가진 육아휴직도 좋았다. 통상 베를린에선 종신계약으로 전환 전, 한 두 번의 기간제 계약을 한다. 그리고 그중 첫 첫 6개월 정도를 수습기간으로 두는데 나에겐 이 수습기간이 가장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열정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일도 적당히 있었으며, 열심을 다했고, 아내도 최선을 다해 심적으로 시간적으로 배려해 줬다.
나의 열심과 다르게 결과는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공모전들은 당선되지 않았고, 1차 관문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그 사이 체감경기는 더 나빠졌다. 경기침체로 인해 취소되는 대형 프로젝트도 많았고, 깊이 보류에 빠지는 일들도 많았다. 그에 따라 인사이동 및 해고 등에 대한 메일을 심심찮게 받았지만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들이라 생각했다. 아니, 적어도 나와는 관계없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길고 어두운 연말이 지나 봄이 올 것 같던 3월, 1년 계약의 종료를 앞두고 나의 계약연장에 대한 인터뷰는 일찌감치 예정되어 있었다. 두 번째 육아휴직으로 사무실을 잠시 비우기 전, 계약 연장에 대한 협의를 마치고 갈 셈이었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인터뷰 약속을 종용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인사부서와 협의를 하고 일정을 조절했다.
나의 근로계약 연장을 위한 인사평가에 참석한 인원은 내가 모두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꽤 안면도 있는 사람들이라 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무슨 말을 할지 별 걱정도 하지 않았다. 나 스스로 생각한 나의 인사평가의 주된 주제는 계약연장이 아니었다. 계약연장은 당연하고,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시기에 임금협상을 하느냐의 주제였다. 그리고 얼마 후, 회의를 마친 참석자들은 모두들 나에게 잘 진행되었으며 별 문제없었다고 했다.
1차 인사평가를 토대로 2차 인사평가는 인사담당 파트너와의 단독 면담이다. 내 차례였다. 예정된 날짜를 기다리며 ‘설마 나의 근로계약이 연장 안될 수도 있을까’라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그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가벼운 근황토크로 시작된 면담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게 끝이 났다. 몇 마디 묻더니 급작스럽게 들어간 본론은 너무 간단했다.
'아쉽게도 너의 근로계약은 연장되지 않을 거야.'
순간 표정관리가 힘들었다. 최대한 담담하게 1차 인사평가에 대해 묻고, 그 결과에 대한 의견도 물었지만 사무실의 현재 상황을 강조하며 이미 결정되었고 자신은 통보만 한다고 전했다. 이미 임원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에 대해 통보하는 칼 같은 분위기에 더 이상 의지를 찾기 힘들었다. 그렇게 타는 목을 한잔의 물로 적시고 쫓기듯 빠져나왔다.
면담장소를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가는 중 아내에게 문자가 왔다. 어떻게 됐냐는 질문에 나는 이따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는 말로 대답을 했다. 그리고 집으로 향하는 1시간 동안 온갖 생각을 했다. 어떻게 이렇게 된 건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장 아내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그래도 집을 들어서기 전, 애써 감정부터 정리를 했다. 나보다 더 놀랄지도 모르는 아내를 위해 최대한 담담하게 이야기를 건넸다. 그리고 그렇게 그날은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일상이 변하려 하고 있었다. 베를린에서는 처음, 아빠가 되고 나서도 처음, 남편이 되고 나서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내심, 별 어려움 없이 원하는 자리를 찾을 거라 자신했다. 우리 가족의 일상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자신감인지 자만인지 판단하기 힘든 생각들로 시간을 지냈다. 그렇게 2024년 긴 봄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