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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의 새로운 친구란

by 베를린부부

애초부터 베를린에는 이직으로 간 것이었다. 새로운 직장이 완전히 새로운 장소에 있다는 것은 일상의 배경이 다른 색으로 한 번에 완전히 바뀌었다는 뜻이었다. 언어도 스페인어에서 독일어로 완전히 다르고, 사람도, 문화도 다르고, 날씨, 먹거리 모두가 변했다. 그래서 한동안 유학으로 독일에 온 이들을 부러워했다.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 만나고 서서히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이 특히 더 부러웠다. 당시 나에게는 그렇게 서서히 느리게 타인과 적응해 가며 새로운 장소에 적응하는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다.


그러나 여느 30대들이 그렇듯, 이런 심적인 동기들이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않았다. 그저 적당히 바쁘고, 적당히 한가하며, 적당히 조용한 일상을 살아갔다. 좁은 인간관계에 때로는 답답하기도 하고, 한적한 주말이 무료하기도 했다. 좋은 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나누고 싶었지만 그냥 그렇게 조용히 조용히 홀로 적응하는 법을 체득해 갔다. 나의 일상은 아주 단순했다. 그리고 그 단순함과 무료함이 싫기도 했지만 좋기도 했다.


당시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이 1년, 2년 조금씩 시간이 지날 때마다 아주 조금씩, 그리고 서서히 동료들과 이야기들을 나눌 기회가 생겼고, 그렇게 베를린에서의 타인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느린 관계의 시계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적응이 그만큼 오래 걸렸다는 것도 있고, 스페인과는 사뭇 다른 독일 사람들의 나름의 관계의 리듬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언어가 가장 큰 장벽이었다. 한 달 두 달이야 동료들의 배려에 묻어갔지만 언제까지나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할 순 없었다.


H는 나와 베를린의 첫 직장에서 알게 된 사이다. 첫 출근 때, 사무실을 돌며 인사를 하다 나 말고 한국사람들이 더 근무 중임을 알게 됐다. 그중 한 명이었던 H는 출근 첫날, 조용히 옆으로 다가와 조곤조곤 본인을 소개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 어색한 첫인사 이후 좀처럼 마주칠 일은 없었다. 그 후로 몇 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몇 개의 프로젝트를 같이 하게 됐고, 그렇게 아주 조금씩 천천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하루, 이틀 하루하루 점심을 먹으며 소소하게 나눈 이야기의 양이 많아질수록 더 깊은 이야기를 하는 스타일이었다. 독일에 건축으로 유학을 와 정착한 그는 그래서 내 독일 생활의 길잡이 같았다. 때론 형처럼, 친구처럼 무심한 듯 따뜻하게, 털털한 듯 살뜰하게 나를 챙겨줬다.


그러는 사이 내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며 자연스레 주말에는 가족들이 함께 만나곤 했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어울렸다. 두 가족은 함께 주말을 즐기며 여행도 가며 휴가도 함께 보냈다. 자연스레 여느 가족에 그렇듯, 이모나 삼촌처럼 서로의 아이들에 대해서도, 각자에 대해서도, 항상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다. 현재도 그 회사에 다니고 있는 그와는 여전히 어제 만난 듯 수다를 떨곤 한다. 여전히 우리는 건축부터 일상 사소한 얘기까지 부지런히 얘기를 나눈다. 이직 결심부터 그 배경의 모든 이야기도 그와 처음 나눴다. 그러니 그는 내가 베를린에 오고 간 과정을 통으로 본 셈이다.


반면 S와는 정말 우연한 기회에 가까워졌다. 그의 가족이 우리 가족이 살던 곳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 오면서 더욱 그랬다. 동네를 오며 가며 한 두 번 인사하다 아내끼리 먼저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몇 번 함께 식사를 함께 하다가 아주 우연히 그와 내가 대학교 동기임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지나간 20대를 동일하게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한국을 떠난 뒤, 나의 20대의 큰 부분인 대학교를 거의 잊고 살았기에 그곳에서의 기억과 인연 역시 희미하게 사라져만 갔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와 나누는 이전 얘기가 반갑고 더 강한 향수를 일으켰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인문계열 학과에서 공부를 했지만 지금은 프로그래머로 살아가고 있다. 학부때와 비슷한 분야에 계속 머무는 나에겐 그의 선택과 삶의 모습들이 너무 흥미로웠다. 취미가 직업이 된 바로 그 케이스로, 8년 전부터 베를린에서 살고 있다. 한때, 스타트업 기업을 전폭적으로 밀어준 베를린시의 영향으로 많은 신생기업들이 전 세계 엔지니어와 프로그래머 등을 베를린으로 유입했다. 그도 그중 한 명이다. 이때 베를린으로 오신 분들 중 많은 분들은 비자도 ‘블루카드’라는 특별한 형태의 비자를 받았다. 베를린이 적극적으로 고소득 전문인력을 유치하려는 노력과 독일 경기의 호황에 만난 황금기였다.


당시 3살 5살이던 아이들은 어느덧 중학생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아이들과 연고 없는 타지에 정착하기는 언제나 눈물겹다. 그의 가정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지금이야 수년의 굳은살이 배겨 가족 모두가 베를린 생활을 잘 즐기고 있다. 그 수많은 마음의 이야기들로 우리 두 가정은 친밀해졌다. 서로 의지하고 배려하고 염려하며, 가족처럼 지냈다.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우리 집 아이들과 S의 아이들도 너무 스스럼없이 잘 지내줬다. 특별한 약속이 없는, 여느 여유로운 주말 저녁이면 우린 당연한 듯 만나 밥을 먹고 놀았다. S의 아내 역시 나의 아내와 격 없이 지내며 아빠들 빼고도 잘 어울리곤 했다.


나의 친구의 가정과 가까워진다는 것은, 나와 내 친구, 아내와 친구의 아내, 아이들의 친구와 두루두루 어울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두루두루 다 함께 어울림이 우린 좋았다. 어느 한 사람이 바쁘면 나머지가 모이는 것에 스스럼없었고, 함께 있으면 함께인 데로, 각자 모이면 각자대로 즐거웠다. ‘나의 베를린’은 왠지 외롭고 쓸쓸했지만 ‘우리의 베를린’은 그래서 언제나 따뜻하고 즐거웠다. 우리 부부는 물론, 우리 아이들에게 부어준 두 가정의 애정과 사랑은 아이들이 성장하며 잊지 못할 중요한 따뜻한 기억이 될 것이다.


이제 한국에 귀국한 지 4달째다. 주말에는 보통 마트를 가거나 아이들과 어디로 놀러 다닌다. 가족모임 외에는 다른 가정과 가족 대 가족으로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 아마도 거기서 주말의 허전함을 느끼는 것 같다. 우리의 주말은 항상 여러 가족이 왁자지껄 만나 서로 어울리는 풍경이었어서 그런 모양이다. 우리 부부는 물론, 아이들도 우리의 '베를린 가족들'의 안부를 묻곤 한다. 앞으로는 우리의 베를린 가족들이 한국에 방문할 때 우리는 만나게 될 것이다. 타지에 거주하는 보통의 가족들이 그러하듯 1년이 한 번씩, 언제나 그러하듯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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