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상사, 꽁지머리 콧수염 J 씨

by 베를린 부부-chicken

by 베를린부부

이 회사에 최초로 면접을 보러 왔을 때다. 비서 아줌마의 전화를 받고 저쪽에서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딱 그랬다. 장발의 머리를 올백으로 깔끔하게 묶어 올리고 아주 잘 다음 어진 풍성한 콧수염은 말할 때마다 씰룩씰룩 대는, 상당히 눈에 띄는 아우라였다. 캐주얼하게 편한 복장으로 출근하는 대부분의 직원과 검은색 정장을 교복처럼 입는 몇몇 사람들 중 단연 눈에 띄는, 자신만의 캐릭터로 승부하는 J가 있었다. 징을 박은 벨트와 90년대 동네 놀던 형이 신었었던 검은 뾰족구두, 그리고 뒷주머니와 벨트 사이에 쇠사슬 벨트. 이 모습만으로 난 사실 시선을 빼앗겼다.

사장 할아버지가 ‘블랙 마니아’인 탓에 보통 거의 직원들이 상복과 같은 검은색 복장을 즐겨 입는다. 나도 검은 바지, 검은 난방, 검은 스웨터쯤은 몇 벌씩 예비로 가지고 있다. (바르셀로나에서 즐겨 입던, 그때 유행했던 소시의 컬러 바지는 이미 의류함이 집어삼켰다.) 그 검은색 복장에도 나름 각자의 기준이 있기 마련인데 어떤 이는 아예 모든 것을 검은색으로 맞추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아예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길을 가기도 한다. 그러나 70명 되는 사람 중 어느 누구도 J와 같이 투머치의 느낌으로 아이템을 착장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난 그가 일하는 스타일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다.


나는 그가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다.

"건축으로 먹고 살기 - 베를린 편"의 12번째 글, "너가 엑스맨이지?"에 J가 등장했었다. 극도로 당황스럽고 짜증이 나는 상황에서도 그는 일단 최선의 길만 이야기한다. 지나간 일에 대한 원망이나 후회는 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도 영향이 있는 것 같다. 쉽게 말해 그냥 잊어버리는 편인 것 같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기억해야 할 것들도 가끔씩 깜빡거리곤 한다. 그래서인지 그가 화내는 걸, 짜증 내는 걸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그의 아내도 같이 일한다. 이 둘은 이곳에서 일하면서 만난 사이인데 둘이 나란히 15년을 거의 가득 채울 정도로 성실하게 근무 중이다. 그의 아내도 보면 좀 호탕하고 약간 푼수 같은 면이 있어서 주변 분위기를 굉장히 유하게 만드는 편이다. 그들의 적이 없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캐릭터에 대한 설명은 되는 셈이다.

내가 감정의 기복을 잘 못 숨기는 편이라 그런지 이렇게 외부로 감정의 기복이 표시되지 않는 사람을 보면 으레 실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분명 어딘가 푸는 데가 있겠지, 혹은 무슨 비결이 있겠지 등의 스스로의 해석을 애써 정당화하곤 했는데 장기간 그와 함께 일하며 아주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조금씩 '그게 가능할 수 있구나'라는 걸 깨달아 가고 있다. 한 번은 술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꺼낸 적이 있는데 그는 대수롭지 않게 그런 감정들이 일에 도움이 안 된다고 아주 담담하게 이야기했더랬다. 뭐 도움이 안 되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그는 조용하게 끝까지 듣는다.

그의 주변에는 정보들이 많다. 모든 공모전과 관련된 사안부터 어떤 투자자의 어떤 제안까지 흥미진진한 정보들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더 흥미 있는 건 물어보면 다 대답한다는 거다.) 공모전과 관련된 모든 인원 및 그 정보들과 관련된 인물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소통의 순간을 맞은편 자리에서 목격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다. 그는 일단 가만히 듣는다. 특히 이곳저곳 엉성한 나의 독일어를 들을 때면 '이게 무슨 소리일까'하는 표정으로 다른 곳에 응시하며 듣기도 하는데 일단 다 듣고 대답을 시작한다. (그럴 때 보면 감정을 극도로 잘 통제하는 게 아니라 감정에 약간 무딘 스타일인 것 같다. 어딘가 모르게 투박한 면이 있는데 그게 그의 본 캐릭터가 아닐까 한다.) 아무튼 잘 듣는 것은 '참 괜찮은' 사람의 공통적인 면모라고 생각한다. 내 발로 상대방에게 볼 일이 있어서 간 게 아닌 이상 나에게 할 말이 있어서 온 사람의 용무를 일단은 다 들어보는 것이야 말로 '예의'이다.


매일매일 마주치는 직장동료는 '직장 사촌'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정말 많은 순간들을 함께하는 사람들이다. '인복(人福)'의 여러 종류 중 직장동료 복도 무시할 수 없는 일상의 조건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환경에서 일하느냐에 따라 좋은 일도 싫어질 수 있고 싫은 일도 흥미로워질 수 있다. 그렇게 쌓인 불만들, 혹은 차분함들이 나의 일상이 되고 나의 성격이 되고 나의 얼굴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내가 J와 같은 사람을 직장에서 만난 건 그냥 '행운'이 아니라 정말 '다행'이었다.


그와 공모전을 하기 전까지 나에게 '공모전'이란 단어는 하루살이와 같은 상태의 촉발제였다. 한마디로 '공모전을 한다'는 나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끝나는 일, 치열함 그 자체였다. 완급 조절은 다른 세상 언어였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8시간씩 일하고, 주말 근무는 최대한 지향하며, 완벽하지 않더라도 정해진 시간에 맞춰진 결과물을 완성하며, 공모전이 끝난 뒤에 며칠씩 뻗어도 되지 않는 공모전의 세계. 이 다른 세상이 내가 그에게 배운 가장 귀중한 자산이다. 마감까지의 시간을 계산해 놓고 거꾸로 작업 스케줄을 잡는 식은 '주어진 시간에 맞는 결과물'에 대한 감을 길러줬다. 물론 이런 환경에 익숙해지면 최소한의 결과물만 만들어내는 나태함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금년 초인가 둘이 뮌헨으로 출장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돌아오는 저녁 비행기 시간에 맞추다 보니 공항에서 저녁을 먹어야 했는데 맥주를 간단히 곁들이며 사소한 얘기를 나눴다. 이런 사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도 아이 둘을 키우는 가장이며 다음 달 대출금을 걱정하는 아주 평범한 직장인이다. 누구나처럼 이번 달, 다음 달의 대출금과 생활비를 걱정하며 지나온 시간이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만든 건지 모른다. 누구나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비슷한 환경에 놓여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깐 마주치는 모습에 얼굴에 미소를 띨 수 있는 여유, 짜증을 내지 않을 수 있는 여유, 적어도 그렇게 되고자 하는 노력이 조금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조그마한 일상이 아닐까.




이전 13화94년생 대학 후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