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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 이틀차 오전, 특별하진 않아도

반작정 떠나는 세계여행(2)

by 부추

여행 이틀째, 오전 10시가 조금 못되었을 무렵 느지막이 눈이 떠졌다. 일어나 거울을 보니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몸도 머리도 찌뿌둥했다. 걱정과 달리 간밤에 잠자리는 생각보다 편했고 수면 시간도 충분했는데, 그동안 쌓인 피로와 여행 첫날의 고됨이 겹친 영향인 듯했다.


출국 직전 약 한 달 동안 어쩌다 보니 부산에서 인천까지 여러 지역을 오가며 그동안 잘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났다. 동시에 곧 닥친 여행 준비와 3년 넘게 살았던 월세방 정리도 병행해야 했다. 내 인생의 많은 과정이 그러했듯 이번에도 모든 것을 벼락치기로 진행했던 탓에 어느 정도의 미흡함은 있었지만, 다시 생각해도 어떻게든 다 마무리를 짓고 지금 이곳 발리에 도착해 하룻밤을 보냈다는 사실이 새삼 신묘하게 느껴졌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것이고, 이제 오늘 당장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제 자기 전 생각해 두었던 오늘 하루의 계획을 다시금 더듬어 보았다. 가장 먼저 할 것은 현 숙소에서 꾸따(Kuta) 해변 근처에 예약해 놓은 숙소로 이동하기. 체크아웃 시각이 12시니 준비할 시간은 충분했고, 도보로 20분 정도면 이동 가능하다. 그다음은 현지 유심 구매하기. 옮길 숙소까지 이동 동선 상에 있는 유심 판매처를 한 군데 봐두었다. 그리고 꾸따란 동네에 적응해 보기. 그 동네에서 적어도 사나흘은 있을 것이니 동네 분위기도 몸에 익히고, 자주 방문할 수 있는 저렴하고 맛있는 식당이나 카페를 찾아놓아야 한다. 하지만 이건 구글 지도와 내 두 다리가 자연스레 해결해 줄 것이다.


사실 이 정도로도 본격적인 여행 첫날의 일정으로 충분하다 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뭔가 중요한 게 빠진 듯한 허전함이 찾아왔다. 따져보면 숙소 이동과 유심 구매는 여행자로서 생존을 위해 당연히 해야만 하는 기본적인 것들이고, 식당이나 카페 탐색도 주요 일정이라 할 수 없는 것들이다. 다시금 여행하면서 항상 싸워왔던 생각과의 재대면, 재대결의 시간이 닥쳤음을 직감했다. 여행을 왔으니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 특별한 일정 없이도 좋은 여행이 될 수 있다는 반론을 항상 펼쳤고 그것을 증명하려 노력해 왔지만, 이번에도 나는 그 습관적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새로움과 익숙함, 특별함과 평범함의 경계는 엄연히 존재한다. 여행과 일상을 구분 짓는 차이점도 그 경계 부근에서 오는 것은 아닐지. 장소만 새롭다고 다 여행일까? 익숙한 곳에서의 특별한 체험은 일상일까? 역시나 애매모호하다.


하지만 치열했던 내적 갈등이 무색해지게, 이번에도 난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돌아다니는 여행 방식을 고수하기로 했다. 준비성 철저한 여행자라면 한 번씩 다 해보는 특정 여행지에서의 특별한 체험, 경험은 다 못해보더라도 조금만 아쉬워하기로 한다. 여행에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마다 각자의 여행 방식이 있고, 난 나의 여행을 하면 된다. 혹여나 나중에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지금 못 해본 건 그때 해보면 되지.


그렇게 전날 생각했던 계획만 가지고 발리에서의 첫 숙소를 빠져나왔다. 오전 11시가 채 안 된 시각이었다. 발리의 햇볕은 매우 뜨거웠고, 오늘도 배낭이 짓누르는 무게는 버거웠으며, 데이터 없는 구글 지도 앱이 먹통이라 찾아두었던 유심 판매처는 지나쳐버렸다. 사실 저기인가 싶은 곳을 발견하긴 했는데, 너무 무겁고 무더워 차마 확인하러 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냥 지나쳤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가 어디인가.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행지 중 하나인 발리인데, 유심 판매처야 넘쳐날 것이다.


곧장 20여 분을 걸었다. 걸으며 본 발리의 길거리 풍경은 어제 늦은 밤과는 완전히 달랐다. 도로에 자동차도 생각보다 많았고, 세련된 상점들이 도로 양켠으로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거리 전체가 햇볕의 열기와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열대 지방 특유의 싱그럽고 짙푸른 나무들이 거리에 생명감을 더해주고 있는 듯했다.


첫 방문한 여행자 티를 팍팍 나도록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숙소에 도착했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지만 몸을 열심히 움직여서 그런지 일어났을 때에 비해 몸 상태는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이번에 예약한 숙소도 마찬가지로 호스텔이었다. 침실이 20인실이라는 사실이 조금 걸리긴 했는데, 1박 7,600원이라는 금액이 모든 걸 납득시켜 버렸다. 아직 체크인 시각이 되지 않아 로비에 짐만 던져놓고 못다 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숙소의 로비가 그리워지는 발리의 날씨가 다시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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