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작정 떠나는 세계여행(3)
호스텔 로비에 짐을 던져놓고 나오기 전, 잠깐 숙소의 공용 와이파이를 사용해 근처 유심 판매처를 찾아보았다. 숙소에서 꾸따 해변과는 반대 방향이긴 했지만, 도보 7분 정도의 거리에 후기가 괜찮은 곳이 하나 있었다. 마침 그 근방이 꾸따에서 유명한 레기안 거리(Jalan Legian)가 시작되는 곳이었기에, 유심을 구매한 후 그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서 지역 탐방을 하면 되겠다 싶었다. 즉흥적인 동선 설계였지만 약간의 뿌듯함이 올라왔다.
판매점에 도착하여 eSIM 이용이 가능한 요금제 중, 30일 동안 34GB의 데이터를 제공하는 유심을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비용은 250K 루피아로, 한화로는 21,000원가량 되는 금액이었다.
저예산 장기 배낭여행자를 지향하는 나에겐 경비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관련하여 여행을 준비하면서 인도네시아의 평균적인 소득과 물가 수준도 간단히 찾아보았다. 2025년 기준 인도네시아의 법정 최저임금은 수도인 자카르타가 한 달에 대략 45만 원, 다른 지역은 주에 따라 19만 원에서 29만 원 사이로, 보통의 임금 근로자 기준 실제 수령액은 30~60만 원 선이라는 통계가 있었다. 한국의 최저임금이 월 210만 원이니, 비교하면 단순 계산으로 5~10배 정도의 소득격차가 존재하는 셈이다. 하지만 소득과 물가 수준은 정확히 비례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니, 실제 물가는 다른 이들의 여러 여행 후기를 참조했다. 결론적으로 적게 잡아도 인도네시아의 물가가 한국에 비해 대략 4~5배가량 저렴할 것이라 계산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250K 루피아라는 유심 가격은 예상보다 다소 비싸게 느껴졌다. 하지만 미리 유심 가격을 자세히 알아보고 온 것도 아니고, 구글 후기도 좋았으니 의구심은 이쯤에서 접어두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 판매점 직원은 빠르고 정확하게 모든 과정을 처리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데이터가 제대로 터지는지 확인한 후 비용을 지불했다. 완벽히 유심을 설치해 준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왔다. 고맙습니다란 뜻의 인도네시아어인 뜨리마 까시(Terima kasih)! 미리 몇 번 연습한 인사말이었지만 내뱉는 나부터가 너무나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인사말을 되네이며 판매점 북쪽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다 보니 레기안 거리 초입이 보였다. 레기안, 또는 르기안 거리는 꾸따의 주요 도로 중 하나로, 이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 보면 꾸따의 윗동네인 스미냑이 나온다. 유명한 뽀삐스 거리(Jalan Poppies 1, 2)도 이 거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처음 본 레기안 거리의 풍경은 흔한 관광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각종 기념품 상점들과 식당, 바, 클럽, 타투 및 마사지샵, 환전소 등 관광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이 거리를 따라 늘어서 있었는데, 조금 특이하다 싶었던 것은 타투샵이 꽤 많이 보인다 정도.
낮보다 밤이 더 유명한 곳이라는데 그래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기념품이나 쇼핑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건지, 기대했던 거리 구경에 대한 흥미는 빠르게 식어갔다. 시계를 보니 이미 정오가 훌쩍 지나있었다.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이 됐구나. 식당을 알아보기 위해 그늘진 곳을 찾아 구글 지도 앱을 켰다.
한식, 중식, 일식, 양식 제외, 고급 식당 제외, 너무 유명한 곳도 제외, 평점 낮은 곳은 당연히 제외. 그러다가 딱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했다. 인도네시아 현지 음식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소박해 보이는 식당. 후기와 사진만 봐도 이미 맛집의 기운을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마침 위치도 꾸따 해변과 레기안 해변 중간 지점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식사 후에는 자연스럽게 해변 산책까지 이어가면 되겠다 싶었다.
레기안 거리를 얼마 더 걸어 드디어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은 거리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음에도, 붐비고 정신없는 거리의 분위기랑은 다르게 평온하고 소박한 곳이었다. 식당 이름은 Warung Tut Taya. 인도네시아에서는 이런 아담한 규모의 노점 식당을 와룽(Warung)이라 부른다는 것도 이때 알게 되었다. 보통의 와룽이 그렇듯 에어컨은 없었고, 카운터석 빼고 모두 야외 테이블이었다.
비어 있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메뉴판을 확인하는데 낯선 음식명들 중에서 익숙한 것 두 개를 발견했다. 나시 고렝과 미 고렝. 인도네시아 음식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니 유명한 것들 중에 하나 골라 먹어보기로 했다. 한국인답게 밥이 더 끌려 음식은 나시 고렝으로, 음료는 무난하게 오렌지주스로 결정을 하고 주문을 하러 가는데, 시켜려고 했던 게 나시(밥)인지 미(면)인지 갑자기 헷갈렸다. 밥이 나시였던가 미였던가. 하마터면 볶음면 먹을 뻔한 것을, 다행히 카운터에도 메뉴판이 있어서 영어 설명을 다시 확인하고 똑바로 주문을 마쳤다.
음식이 나왔다. 전날 아침 겸 점심을 먹은 이후로 28시간 만에 먹는 음식이라 그랬던 건 아니고, 정말 맛있는 볶음밥이었다. 잘 볶아서 동남아 특유의 길쭉하고 찰기가 없는 쌀알에 고소한 기름과 짭짜름한 간장맛 양념이 진하게 배어 있는, 한창 먹다가 간이 좀 세다 싶을 때 들이켜는 달달하고 시원한 오렌지주스가 전체적인 음식의 균형을 잘 잡아주는, 한 마디로 누구나 좋아할 만한 그런 볶음밥. 특별하진 않지만 맛난 음식이 이곳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듯했다.
만족스럽게 점심 식사를 마무리하고 계산을 하려고 가격을 보는데, 이번에도 이 가격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볶음밥과 주스가 17K 루피아(1,450원) 밖에 안된다니. 내가 지불하는 금액이 과연 정당한 금액인가, 아까 구매했던 유심 가격과의 괴리가 커서 그런지 혼란스러웠다.
물가가 낮은 국가에 오면 특히 더 헷갈린다. 시세에 비해 비싸면 다른 판매자와의 형평성 문제가 생각나고, 저렴하면 저렴한 대로 국가 간 경제력 차이로 인한 이 혜택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 누군가의 혜택은 누군가의 손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으니. 이렇게 마음 불편할 일 없게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상품에 대한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상론일 뿐이겠지.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이미 꼬일 대로 꼬여 이런 현실이 당연시된 상황 아래, 보잘것없는 여행자 입장에서는 이 행운에 감사하며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와룽을 나와 조금 전 미리 계획해 둔 코스대로 해변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어느 정도 동네 구경도 했고, 맛있는 현지 음식도 먹고 나니 이곳의 분위기에 얼마간 적응도 된 듯했다. 앞서의 복잡한 생각은 털어내고, 발리에 도착한 뒤로 아직 바다 한 번 못 봤는데 서퍼들의 성지로 유명한 이곳의 바다는 어떨지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