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작정 떠나는 세계여행(5)
여행 셋째 날 11시가 조금 안 돼서 숙소를 나왔다. 느긋하게 일어나 유유히 숙소를 나오니 그 시각이었다. 해는 이미 높이 떠서 직사의 광선을 내리쪼여 주고 있었다.
전날은 일찍 하루를 마무리하고 침대 위를 뒹굴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캡슐 스무 개가 2층 높이로 겹겹이 쌓여있는 곳이 내 침실이었다. 캡슐 출입구를 가려주는 블라인드가 얇아서 소음과 빛을 제대로 막아주진 못했지만, 폭신한 침대와 시원한 방 온도는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개인 공간이 보장되어 있다는 게 좋았다. 좁든 넓든,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공간에서의 휴식. 외향성이 요구되는 여행 속에서 내향적인 내겐 그런 공간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닷새 만에 갖게 된 평화였기에 저녁 식사도 건너뛰고 그 시간을 만끽했다. 어제 점심에 먹은 나시 고렝 이후 뱃속에 들어온 것이라곤 미지근한 물뿐. 배는 고팠고, 자연스레 어제 갔던 와룽이 떠올라 거기서 점심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와룽까진 숙소에서 도보로 약 30분. 가장 가까운 길은 어제 걸었던 레기안 거리를 통하는 것이었는데, 이번엔 해변에 맞닿아 있는 길로 가보기로 했다. 봤던 풍경을 다시 보는 것보다, 살짝 돌아가더라도 새로운 거리의 모습을 구경하며 가는 게 더 낫겠다는 이유에서였다. 갔던 식당은 또다시 가도, 갔던 길은 굳이 피해서 가는 것. 두 행위가 서로 모순된다는 생각이 언뜻 든다. ‘새로운 길은 괜찮지만 새로운 식당은 위험해.’ 평소 도전이나 모험보다는 안전하고 익숙한 것을 더 선호하는 나의 성향과 여행이 만나면 결국 여차한 결말로 흐를 때가 많았다. 처음엔 게으름 또는 안주 때문이라 여겨 자책감 비슷한 것도 느끼곤 했지만, 반복되는 경험과 되물음을 통해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또한 나만의 여행 방식이라는 것을.
해변 바로 옆으로 나있는 길에 접어들었다. 상업적 성격이 짙은 꾸따의 여느 거리들과 유사해 보이면서도 이곳 특유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노방에는 기념품, 음식과 음료를 판매하는 노점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노점 사이사이로 어제 봤던 꾸따의 모래사장과 파도, 그리고 휴양지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전체적으로 큰 거리보다 한적했고, 곳곳에 있는 나무 그늘 덕분에 걷기에도 좋았다. 덕분에 느긋하게 풍경을 감상하며 걸어보았다.
해변 중심지 부근까지 올라오니 이전엔 간간이 보였던 서핑샵들이 자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길가에 있던 몇몇 현지 사람들이 웃으며 오랜 친구 대하듯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외지인에게도 허물없이 대하는 게 바로 발리의 문화구나 싶어, 나도 답례로 최대한 쾌활해 보이게 "할로(Halo)!" 하며 인도네시아 식 인사로 응수해 주었다. 몇 명과는 인사 후 짧은 대화도 나눴다. 하지만 처음도 두 번째도 서핑 권유로 대화가 마무리되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서핑 강습 호객을 위해 말을 건 것이었다. 그들의 매력적인 미소와 태도에 홀려 바로 눈치챌 수 없었던 것 같다. 발리에 왔으니 서핑 생각은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거니와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상태였기에 일일이 거절을 하며 남은 길을 지나가야 했다.
꾸따식 호객에 약간의 피곤함을 느끼며 와룽에 도착했다. 전날 나시 고렝은 경험해 봤으니, 오늘은 미 고렝을 먹어볼 생각이었다. 배가 고파서 곁들여 먹을 음식으로 야채와 닭고기를 넣고 끓인 국인 짭짜이(Capcai)도 함께 주문했다. 처음엔 Capcai를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몰라서 캡카이라고 했는데, 음식이 제대로 나온 걸 보니 다행히 잘 전달된 모양이었다. 특별한 맛이라 하긴 어려워도 두 음식 모두 적당히 짭짤한 간도 좋았고, 면과 야채의 익힘 정도도 적절해서 마지막까지 맛나게 먹을 수 있었다. 더운 날 야외에서 뜨거운 국을 먹느라 예상치 못한 땀을 빼긴 했지만 과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늘의 식사비는 35K 루피아(약 3,000원). "뜨리마 까시!" 인사로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고 와룽을 나왔다. 이 인사말도 몇 번 해보는 사이에 조금 익숙해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