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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하게, 발리(2)

반작정 떠나는 세계여행(6)

by 부추

식사가 끝나니 이제 갓 정오를 넘긴 시각. 이후 계획이 없어 식사 중에 고민을 해보았다. 근처 괜찮은 카페에서 커피나 한잔할까, 파라솔 밑에서 파도 소리를 배경음 삼아 독서 시간을 가져볼까, 아니면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 볼까. 다양한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다 구글 지도를 펼쳤다. 주변을 쓱 훑다 보니 스미냑 또는 세미냑(Seminyak)이란 글자가 눈에 띄었다. 블로그와 유튜브에서 발리 여행 중 방문해 볼 만한 곳으로 추천하던 곳이었다. 꾸따보다 세련되고 한적하지만 물가는 훨씬 비싸다고 했던가. 여유 있는 가족 단위 여행객들에게 적극 추천하는 곳이라 했는데. 나 홀로 여행객에 여유라고는 일정 말곤 없어도, 딱히 할 것도 없던 차에 한 번 가보기로 했다.


와룽에서 시작해 30분가량을 레기안 거리를 따라 쭉 걸어 올라갔다. 지도를 보지 않아도 스미냑에 들어섰음을 풍경의 변화로 감지할 수 있었다. 좀 더 정돈된 듯한 분위기에 관광객들로 복잡 거리는 것도 꾸따보다 덜했다. 길가 건물들의 외관은 더 고급스러워졌고 간판들도 세련되어 보이긴 했다. 하지만 결국 이곳도 상점가와 식당가의 끝없는 나열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떤 특별함을 바라고 온 것도 아닌데. 라야 스미냑 거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오늘의 스미냑 구경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위로 올라가던 방향을 좌측으로 틀어 스미냑 해변 쪽으로 향했다. 섣부른 판단일 수 있지만, 앞으로 더 가더라도 비슷한 광경을 보게 될 것 같았다.

라야 스미냑 거리(Jalan Raya Seminyak)


고급 리조트와 호텔이 빡빡이 들어서 있는 구역을 지나 스미냑 해변의 입구에 다다랐다. 그곳에도 약간은 초라해 보이는 규모의 발리 짠디 븐따르가 해변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석문 가운데를 통과해 뻥 뚫린 해변으로 나왔다. 스미냑 해변의 생김새나 분위기는 꾸따, 레기안 해변과 사실상 이어져 있어서 그런지 퍽 흡사하긴 했으나 아름답긴 매한가지였다. 멀리서부터 규칙적으로 밀려오는 파도에 마음도 안정을 되찾는 듯, 파도 부서지는 소리에 갑갑했던 심정도 함께 바스러지는 듯했다. 해변을 마음껏 거닐며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지나치는 사람들의 느긋하고 행복한 표정, 아이들의 천진난만함, 서퍼들의 생기 가득한 몸짓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문득 내가 그들을 바라보며 행복을 느끼는 것처럼, 그들도 날 바라볼 때 행복까진 아니더라도 긍정적인 기운을 받을지 궁금해졌다. 이왕이면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스미냑 해변


바닷바람과 함께 느린 발걸음으로 레기안 해변을 거쳐 꾸따 해변까지 내려왔다. 오늘 오전 와룽 가는 길에 외관이 괜찮아 보이는 카페를 발견하고 구글 지도에 저장해 두었다. 마침 그곳 위치도 꾸따 해변 근처라 잠시 들렀다 가기로 했다. 방문한 카페는 꾸따 비치워크 몰에 입점해 있는 퍼센트 아라비카로, 한국에선 응 커피라고 부르는 곳이다. 깔끔하고 세련된 인테리어에 입지도 좋아서, 카페 내부와 바깥 구경하며 쉬기 알맞은 곳이었다. 커피 맛은 글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는데 어떤 맛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창가 자리가 나길 잠시 기다리다 마음에 드는 자리를 잡았다. 커피를 홀짝이며 앞으로의 여행 계획도 세워 보고, 이번 여행기 프롤로그도 다듬어 보고, 지나다니는 사람 구경도 하다 보니 어느새 일몰 시간이 다가와 있었다.

퍼센트 아라비카 카페(% Arabica Bali Kuta Beachwalk)


하루 중 해 질 무렵의 시간을 가장 좋아하는 나이기에, 발리의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보기 위해 다시 해변으로 돌아왔다. 하늘을 보니 구름이 수평선 부근까지 내려와 있어서 제대로 된 일몰은 보기 힘들 것 같았다. 그래도 노을 지기 전 꾸따 해변의 풍경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간조 때라 바닷물이 빠진 공간을 남은 바닷물에 적셔진 모래가 대신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하늘과 구름의 빛깔을 은은하게 반사해 주고 있었다. 멀리 모래 위를 걷는 사람이 마치 하늘 위를 떠다니는 듯, 사진에서만 봤던 우유니 사막을 앞에 두고 있는 듯 황홀한 광경이었다. 나도 신발을 벗고 촉촉한 모래 위를 걸으며 하늘을 걷는 상상을 해본다.


여행을 하다 보면 무작정 돌아다녀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하루가 완성되는 날이 있다. 모든 날이 다 그렇진 않고 깜짝 선물처럼 가끔 하루씩 나타나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 아닐까 싶다. 발리의 바다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한 마디로 바다에서 시작해 바다로 마무리된 하루였다. 앞으로의 여행에도 오늘 같은 날이 한 번씩 찾아와 주기를.

일몰 무렵의 꾸따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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