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보바리, 귀스타브 플로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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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버킷랩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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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제목이 가진 유명세에 비해서 실제로 읽은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은 책이기도 한데요. 아마도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도 완독의 큰 장애물이 됐을거라 생각합니다.
읽는 사람도 분량에 괴롭지만 작가인 플로베르 자신도 쓰는 사람으로써 상당히 괴로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플로베르가 이 책을 쓰기까지 4년반이 걸렸고, 민음사 버젼의 역자인 김화영 교수님이 번역하기까지 3년이 걸렸다고 하니 500페이지에 7년반의 세월이 농축되어 있는 격입니다.
단순하게 계산해보면 이 소설은 일년에 대략 67페이지가 쓰여졌고, 1페이지에 5일치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렇게 누군가 상당히 고민해서 만들어 낸 결과물을 손쉽게 엿볼 수 있다는 것이 독서에 주요한 장점 중 하나이기도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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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플로베르의 고생은 헛되지 않았고, <마담 보바리>는 문학사적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작품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현대소설과 그 이전의 소설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여겨지게 된 것인데요.
<보바리> 이전까지의 문학들이 강한 종교적 색이 만연한 사회에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주제로 이루어진 문학’작품’과 전혀 그렇지 않은 ‘저질’로 간단히 나뉘어져서 “무엇을 쓰느냐”, 그러니까 “신앙 혹은 도덕이냐 / 그렇지 않으냐”에 한계 속에 있었다면 <보바리>는 “무엇”이 아닌 “어떻게 쓰느냐”에 집중하면서 그 경계를 넘나듭니다.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인간 자체에 대한 분석적 태도를 놓고 보자면 가치있는 작품이라 불러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여성의 반복되는 간통과 쾌락주의적인 작중 행태를 놓고 보자면 저질이라 불릴 수도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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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이렇게 작품과 저질 사이에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게 만든 데에는 플로베르의 문체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작중 인물의 행동이나 마음을 문학적으로 미화하거나 과장하려는 욕심을 의도적으로 철저히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서술하려는 태도, 즉 사실주의라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소설은 작중 인물이 보고 느끼는 그대로를 전달할 뿐이고 텍스트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유보되는 것입니다.
낭만적 내용과 사실적 스타일의 만남은 ‘작품이냐 저질이냐’의 거대한 질문 뿐만 아니라 소설 속 내러티브에 대한 질문 역시 독자에게 던지는데요. “그렇다면 작가 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리>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철저히 묘사하고자 했던 그 ‘사실’이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입니다.
질문의 범위를 더 좁혀서 한 명의 캐릭터가 보여주는 사실, 리얼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면 역시 못말리는 엠마가 떠오릅니다. 플로베르가 보여주고자 했던 엠마는 [무절제한 욕망에 의해 자멸한 인간] 일까요, 아니면 [자기 욕망에 솔직한 생명력 있는 인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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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절제한 욕망에 의해 자멸한 인간]으로 엠마를 보자면 그녀가 처음 샤를과 결혼한 뒤, 결혼 후에 오는 권태가 고개를 들기 시작할 무렵 강아지와 산책을 나간 장면이 떠오릅니다. 강아지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이끌리는대로, 제자리를 돌며 [나비, 들쥐, 개양귀비꽃] 등을 쫓고 있고 엠마는 ‘내가 왜 결혼했지!’라고 후회하는 장면인데요.
[나비, 들쥐, 개양귀비꽃은] 각각 화려하지만 닿을 수 없는 나비인 무도회의 자작, 엠마의 욕망을 사욕을 위해 이용한 들쥐같은 로돌프, 끝내 화려한 꽃을 피웠지만 금새 시드는 개양귀비꽃같은 레옹과의 만남에 비유되어 짐승처럼 순간의 쾌락을 쫓는 것을 거듭하는 그녀의 자멸을 암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마담 보바리>의 작품해설(김화영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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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달리 엠마를 [자기 욕망에 솔직한 생명력 있는 인간]으로 보자면 그녀가 레옹이나 로돌프와의 만남에서 보여줬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서로가 좋아하고 있음을 은연 중에 깨닫고 레옹을 그토록 그리워했음에도 막상 레옹이 자신 앞 나타나면 기쁨보다는 홀로 그를 그리워할 때만큼 설레이지 않는다는 슬픔에 주목하는 점이나,
로돌프와의 첫 정사 중에 로돌프의 존재는 간데없고 엠마 자신이 감각하고 있는 세계로 빠져드는 점 등은 엠마가 ‘사랑을, 혹은 남성을 욕망하는 존재’라기 보다는 ‘욕망하는 자기 자신을 욕망하는’ 것에 도취되어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데요.
엠마는 욕망을 현실화 하는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욕망한다고 믿는 그 삶을 지켜내기 위해서 아이와 남편도, 자신의 목숨까지도 투신해버릴 수 있을만큼 자기 욕망에 충실한, 욕망에 투신하는 생생한 있는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참조: 아트앤스터디 <소설의 미로: 이야기 혹은 화이트 노이즈> 15~17강 (김진영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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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가 보여주고자 한 ‘리얼리즘’에서 엠마의 ‘리얼’한 모습이란 어리석게 스스로의 삶을 파괴한 모습일까요, 아니면 본능에 충실한 삶을 건축한 모습일까요?
이 질문은 독자가 무엇을 ‘리얼’로, 어떤 것을 ‘현실’에 충실한 삶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한쪽의 리얼은 다른 한쪽의 경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답을 유보하는 작가 플로베르는 소설 내내 그토록 경멸하며 동시에 안쓰러워했던 엠마라는 인물이 곧 자기 자신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엠마 보바리를 깨워보는 매우 즐거운 시간을 선물하는 책,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