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계산서를 내는가에 관하여

더치페이 그리고 사랑

by 검사이다


스웨덴의 어느 초여름 날, 친구의 바비큐 파티에 초대받았다. 나는 영국친구와 와인 한 병을 들고 갔다. “이런 자리는 다 같이 나누는 거겠지,” 생각했다.

아뿔싸. 모두가 각자 바비큐에 구울 것을 준비해 왔고 우리는 나눌 음식이 없어 뻘쭘하게 와인을 홀짝이며 앉아 있었다. 누가 우리에게 음식을 건네지도 않았고, 나 역시 한국처럼 한입 만~할 용기도 내지 못했다.

끝날 때는 각자가 가져온 남은 술을 다시 가져갔다. 스웨덴의 개인주의는 때로 조용하고, 단단하고, 차갑다.

100년 된 스웨덴식 미트볼 레스토랑을 갔었다.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스코틀랜드 억양으로 한 남성이

"내가 여기 들어가도 되는 거야? o_o"

라고 물었다.

화장실이 성별 구분 없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에서도 이 나라의 평등 의식을 느꼈다. 여성이 약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 그렇기에 여자가 무거운 짐을 옮기거나 노인이 지하철에서 서있어도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서서 돕지 않는다. 그건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평등에 대한 존중이다. 나는 그 태도가 한편으로는 멋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로웠다.


반면, 두브로브니크에 갔을 때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레스토랑에서 내가 지갑을 꺼내려 하자 친구들이 말했다.
“여자는 여기서 돈 안 내.”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진지했다. 그곳은 여성이 주로 아이를 돌보고, 남성이 경제를 책임지는 구조였다. 가부장적이라는 말로 쉽게 설명될 수 있지만, 그 사회는 또 나름의 온기가 있었다. 마치 오래된 방식 속에서 서로의 역할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어떤 체념 혹은 애정의 형태처럼 보였다.

한국은 그 중간쯤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더치페이를 하기도 하고, 남자가 조금 더 내는 문화도 여전히 남아 있다.

사실 누가 계산서를 내야 하느냐는 단순한 경제적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고, 때론 조용히 그가 산 술 한 잔을 건네받으며 “오늘은 너에게 기대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 싶기도 하다.

프랑스 철학자 앙드레 콩트-스퐁빌(André Comte-Sponville)은 말했다.



“사랑은 평등 속에서 서로에게 기댈 줄 아는 능력이다.”




꼭 반반씩 나누지 않아도 좋다. 때로는 내가 더 내고, 때로는 당신이 더 내도 된다. 중요한 건 마음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가이다. 평등을 존중하되, 감정을 나누는 따뜻함을 잊지 않고 싶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바비큐 파티든, 계산서든 — 결국 인간관계는 받는 것과 내어주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 속에 있다. 그리고 그 균형은 때론 계산기보다 마음으로 계산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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