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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식문화기록자 Aug 20. 2019

충신 · 효자 · 열녀 · 의복, 장무공 가(家) 충절

언양 김씨 장무공 김준 종가

전북 정읍시 언양 김씨 장무공 김준 종가, 불천위 제사 모셔
끝까지 주인 가족 목숨 바쳐 지킨 노복 헌충의 제사도 매년 지내


때는 1625년 인조 3년 을축년(乙丑年) 봄이다. 김준(金浚, 1582년~1627년) 장군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고, 안주목사 겸 방어사(安州牧使 兼 防禦使)가 됐다.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에 있는 안주성은 서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요충지였다.

그 후 3년, 1627년 인조 5년 정묘년(丁卯年) 정월에 오랑캐(후금, 훗날 청나라)가 쳐들어왔다(정묘호란). 청천강 이북 조선 진영이 함락되자 절제사(節制使)였던 남이흥이 수백 명 병력을 이끌고 안주성으로 달려왔다. 1627년 1월 20일, 후금 병력은 안주성 문 턱까지 밀고와 사면에서 몇 겹으로 성을 에워싸서 포위했다. 다음날까지 후금은 조선에 두 차례 항복을 권유했지만 안주목사 김준 장군은 응하지 않았다. 후금은 안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병력을 몰아쳤다. 안주성 기둥에 기대 화살로 적을 쏘던 김준 장군은 화살이 떨어지자 밑에 깔아 둔 화약고에 불을 붙여 달려드는 적병 수백 명과 함께 자폭했다. 이 날이 1월 21일. 3일간 크고 작은 격전이 끝나고 안주성은 함락됐다.

후금이 쳐들어왔을 때, 안주성에는 김준 장군과 일찍 명을 달리 한 정실부인의 둘째, 넷째 아들, 둘째 딸, 첩과 어린 딸이 함께 있었다. 시집간 둘째 딸의 시아버지가 김준 장군에게 요청하기를, "나의 며느리는 마땅히 우리 집으로 와야 하니 보내 주었으면 한다."라고 했지만, 김준 장군은 허락하지 않았다. 안주성에 함께 있던 안주병사 남이흥은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임금에게 장계(狀啓)를 보내자면서 김준 장군의 둘째 아들을 추천했다. 하지만 김준 장군은 "성이 함락될 수 있는데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성 밖으로 보낼 수 없다."라면서 완강히 거부했다. 남이흥은 자신의 아들을 대신 보냈다. 이어 남이흥은 후금에 안주성이 포위됐으니 성 밖으로 나가서 싸울 것을 김준 장군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김준 장군은 "棄城野戰(기성야전)이 何意意也(하의의야)요?, 我(아) 腰唯一劍(요유일검)하니 公(공) 任意(임의)대로 하시오!". 즉 "성을 버리고 밖에서 싸우자는 말은 싸우다가 도망치자는 얘기 아니오?, 내 허리에 칼 한 자루 차고 있으니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도망가면 내가 죽일 것이오!"라고 엄포하자 안주병사 남이흥은 김준 장군의 기개에 눌려 밖에 나가서 싸우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김준 장군이 전사하고 남은 첩(김씨)은 어린 딸과 친정에 와있던 정실부인의 둘째 딸과 함께 성 안 마을에 몸을 깊이 숨겼다. 후금군이 마을을 샅샅이 뒤져 안주목사 김준 장군 첩과 두 딸의 은신처를 찾자 함께 있던 노복 헌충(獻忠)이 그 앞을 가로막으며 "주인의 가족이 여기에 있으니, 네가 나를 죽이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며 끝까지 주인의 딸들을 지켰지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또 김씨는 "주군이 이미 나를 위해 죽었는데 첩이 어찌 주군을 위해 죽지 않겠는가?"라며 그 뜻을 굽히지 않자 후금군은 김씨와 어린 딸, 노복 헌충을 모두 죽였다. 둘째 딸은 칼을 뽑아 자결했지만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후금군은 김준 장군의 딸인 것을 알고 의원을 시켜 살리려고 했지만 도중에 죽었다. 후금군은 김준 장군의 딸을 의롭게 여겨 "조선 여자는 음란한 중국 여자와 비교가 안된다."라고 했다. 어린 넷째 아들은 백성들이 숨겨줘 목숨만은 살릴 수 있었다.

가족을 성 밖으로 피신시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가족의 생명보다 나라를 위해 맞서 싸우는 것을 선택한 안주목사 김준 장군과 아들, 첩, 노복의 충정을 기려 인조는 "충신, 효자, 열녀, 의복이 당대에 고루 갖추어진 집안"이라며 충절의 혼을 위로했다.

                                    



仁祖朝(인조조) 壯武公(장무공) 丁卯胡亂(정묘호란) 徽勳錄中(휘훈록중) 拔萃文句(발췌문구)                                                    

父死於忠(부사어충) 子死於孝(자사어효) 妾死於烈(첩사어열)
一家之內(일가지내) 三綱備矣(삼강비의) 萬古綱常(만고강상) 賴而父子(뢰이부자)

아비는 죽어 충신이고, 아들은 죽어 효자이며, 첩은 죽어 열녀이다.
한 집안에서 삼강을 갖추었으니 만고에 삼강오륜을 갖춘 집안은 너의 부자뿐이다.




1681년(숙종 7년) 김준 장군의 불천위 명을 받고 부조묘를 창건했다. 매년 음력 1월 21일이 되면 전북 정읍시에 위치한 언양 김씨 장무공파 종중에서는 김준 장군 불천위 제사를 지낸다. 좌찬성 장무공 김준 장군과 정경부인 의령 남씨 부인, 정부인 김씨 신위를 모신 부조묘에서 거행된다. 이 때는 목숨을 내놓으며 주인의 가족을 끝까지 보살핀 노복 헌충을 위해 마부상(馬夫床)을 차려 종중에서 제사를 함께 지내고 있다.                                                     





1열은 반(飯), 잔(盞), 갱(羹)을 각 3기를 올렸다. 2열은 살짝 불에 직화로 구운 마른 북어와 육포를 함께 쌓은 포(脯), 돼지머리를 삶아 올린 육적, 소고기와 토란대, 당근, 쪽파, 꽈리고추를 꼬치에 꿰서 달걀물에 묻혀 지진 산적과 동태전, 느타리버섯전, 도라지전 그리고 어적으로 찜통에 넣고 쪄 낸 병어와 조기 1기, 민어와 홍어 1기, 도토리묵을 차례대로 올렸다. 3열은 소고기 넣은 육탕, 두부를 넣은 소탕, 마른 홍합과 새우를 넣은 어탕을 끓여 올렸다. 4열은 고사리나물, 도라지나물, 시금치나물, 편(떡), 꼬막을 올렸다. 5열은 대추, 밤, 감, 배, 사과, 딸기 순으로 놓았다. 올라가는 제물보다 제사상이 작아 정확히 열을 맞춰 진설하지 않았지만 1열 반(飯), 2열 적(炙), 3열 탕(湯), 4열 채(菜), 5열 과(果)에 따른 순서를 기준으로 진설했다. 장무공 종가의 제례음식 특징은 불천위 제사상 옆에 마부상을 차려 노복 헌충을 기리고 있다는 것이다. 노복 헌충의 제사상은 반, 잔, 갱, 조기 1마리, 고사리나물, 도라지나물, 시금치나물, 명태전, 느타리버섯전, 도라지전을 올린다. 그리고 전라도 지역에서 주로 올리는 꼬막을 해과(海果)로 올렸다.

종가의 불천위 불천위 제사는 가문, 지역, 학파에 따라 제사상에 차리는 음식 종류와 조리법, 진설 방식에 많은 차이가 나타난다. 불천위 제사는 일 년에 한 번 지내기 때문에 그 순간을 기록해 두지 않으면 시간이 지난 뒤 변화 양상을 파악하기 어렵다. 기억을 통해 차세대에게 전수되는 변화의 폭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은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매년 불천위 제사 때 사당 한편에 노복 헌충을 위한 제사상을 마련한다.


1627년 1월 21일, 김준 장군과 남이흥 장군은 후금군에 의해 안주성에서 같은 날 전사했다. 충남 당진시에 위치한 의령 남씨 성은 남이흥 종가에서도 같은 날 불천위 제사를 모시고 있다. 불천위를 모시는 조상이 같은 곳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일로 두 종가는 지금도 종손 간 왕래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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