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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Mar 21. 2018

경험과 여유로 풍족해지는 것, 취향

작가 지망생의 습작(習作) #8

※ 커버 사진은 핀터레스트(pinterest.co.kr)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A와 B, 어떤 게 더 좋아?”


 이런 질문에 쉽게 답하기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A가 좋은데, B가 좋다는 사람이 많으면 B가 더 좋은가? 싶기도 하다. 사실 답은 없다. 나는 A가 좋고, 그는 B가 좋을 뿐이다. 하지만 모두가 ‘Yes’라고 할 때 ‘No!’라고 당당하게 표현하는 것에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다. 가끔은 No에 대한 몇 가지의 근거를 들어 논리적으로 상대를 설득해야 한다. 단지 내가 더 좋다고 느끼는 것을 말하는데 이유를 설명하기란 참 피곤한 일이다.     




 나는 화장품 회사에서 판촉을 담당한다.

 판촉, ‘판매촉진’의 줄임말이다. 판매촉진이라고 하면 범위가 꽤 넓지만, 간단하게 말해 고객이 우리 제품을 사고 싶게 만드는 일이다. 최근 많은 화장품 로드샵 브랜드에서 활용하는 전략인 ‘3만 원 이상 구매 시 OO 파우치 증정!’에서 'OO 파우치'가 내가 개발하는 판촉이다.      


 판촉을 만들면서 가장 고민하는 것은 ‘이 제품을 주면 물건을 사고 싶을까?’이다. 김난도 교수의 2018년 소비 트렌드 ‘Wag the dogs(꼬리가 몸통을 흔든다)’이 이슈가 되면서 고민에 무게가 더해졌다. 몸통을 흔들려면 대체 얼마나 힘차게 꼬리를 흔들어야 한단 말인가? 더욱이, 수익을 창출하는 게 목적인 기업의 입장에서 꼬리는 절대 몸통보다 비싸면 안 되며, ‘적절한’ 수준의 비용을 지켜야 한다. 예쁘지만 저렴한 판촉을 만들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판촉의 가성비에 대한 것보다 나를 더 괴롭히는 것이 있다. 갖고 싶은 판촉을 만들기 위해서는 갖고 싶은 수준으로 제품을 개발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 안목을 갖추는 것이 내 업무의 필수 역량이다. 나, 나 말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매력적이고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서 안목을 높여야 한다는 직업병이 나를 재촉한다. ‘얼른 글 마무리하고, 핀터레스트(pinterest)나 열심히 들여다봐!’라고.     




 안목(眼目)은 취향과 아주 가까운 관계다.

 뛰어난 안목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사람의 취향은 고급스럽다고들 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의 취향은 종종 무시된다. 서럽지만 정말 그렇다. 내가 만드는 판촉을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나의 안목이 매우 중요하다.


 훌륭한 판촉 담당이 되기 위해서는 뛰어난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새롭고, 핫(hot) 한 것을 자주 보고, 보고, 또 봐야 한다. 이게 왜 인기 있는지, 왜 아름다운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지만, 보다 보면 보인다. 나도 모르는 새 A와 B 중에서 A에 사람들이 더 열광할 것이라고 뚜렷하게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안목을 가꾸기 위해서 많이 ‘본다’고 얘기했던가? 본다는 것은 경험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경험의 폭이 넓을수록 선택지는 다양해진다. Yes or No 나 오지선다 객관식에 겨우 대답하던 것에서, 논술형 문제에 막힘없이 대답을 풀어낼 수 있도록 하는 힘은 경험에 있다. ‘좋아하는 과일이 사과니, 배니?’ 하는 질문에 망고스틴이 좋다고 대답하기 위해서는 일단 망고스틴을 먹어봐야 한다. 사과나 배가 명절에 금값으로 뛰어오르지 않는 이상, 망고스틴은 그것들보다 항상 비싸다. 국내에서는 찾기 힘든 과일이니, 동남아시아 여행을 가서나 진탕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망고스틴을 먹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비싼 돈을 주고 사던지, 동남아시아에 여행을 가서 사던지, 결국 시간과 돈이라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안목은 경험과 여유가 있어야 가꿀 수 있다. 취향도 이와 다르지 않다. 경험과 여유가 취향을 풍족하게 한다.     




 풍부한 취향을 가진 사람에게선 자본의 향기가 느껴진다.

 만 원으로 며칠 끼니를 때워야 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살 수 있는 사람 사이에는 이미 취향의 차이가 벌어진다. 배가 고프더라도 참고 취향에 투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존과 깊이 관계할수록 취향은 뒷전이 되고 만다. 내가 업무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글 쓰는 일에 본격적으로 덤벼들고 싶다가도 끝내 현실에 머무르고 마는 이유는 결국 생존하기 위해서다. 매일 안목과 취향을 함부로 평가받으면서도 이 일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일을 통해서 취향을 풍요롭게 할 자본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씁쓸히 생각해본다.     


 월급의 노예 같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지고 싶지 않다. 판촉 개발자로서 고객들이 나의 제품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큰 성취감을 준다. 트렌드를 파악하고 그것을 제품에 알맞게 녹여내면 쾌감을 느낀다. 업무 수행이라는 강제성이 있긴 하지만, 예쁘고 트렌디한 것을 찾아내는 일은 자연스레 나의 안목을 높여주며 취향을 풍족하게 한다. 이 일 또한 결국 나의 취향을 형성하며 훗날 글 쓰는 일에 거름이 되는 것이다.     




 취향을 가진 사람은 섹시하다.

 나의 연인은 돈을 아끼는 편이다. 먹는 것과 입는 것에 특히 그렇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아르바이트비를 모아서 DSLR 카메라를 샀다. 사진 찍는 게 취미였다. 대학교 때는 홍대에서 밴드 공연을 했다. 음악을 좋아해서 전자 키보드와 기타를 샀다. 밴드 ‘더더(THE THE)’의 노래를 좋아해서 앨범을 샀다. 그 밴드의 보컬이 박혜경에서 한희정으로 몇 번째 앨범에서 바뀌었는지 기억한다. 그녀들의 목소리에 대해 논하는 그의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수영에 재미를 붙이고는 출근 전 귀한 시간을 내어 강습을 받았다. 취향의 풍요를 위해 경험과 여유를 아끼지 않는 그가, 섹시하다고 느꼈다.     


 나는 매월 십만 원을 책을 사는 데 쓴다. 읽은 책은 SNS에 기록을 남긴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글쓰기 모임에 참여한다. 밤에는 잠을 줄여가며 한 편의 에세이를 쓴다. 활자에 파묻혀 사는 삶을 꿈꾸는 나는, 이렇게 취향을 공들여 가꾼다. 더는 A와 B 중 어떤 것이 좋냐는 물음에 주저하지 않는다. 대화를 나눌 때 구태여 나의 취향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타인의 깊이 없는 평가에 흐트러지지 않는 확고한 취향을 가진 나의 모습이 조금 섹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취향을 가진 삶, 어떻게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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