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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Mar 28. 2018

숭고함과 비겁함, 지젤(Giselle)

생에 첫 발레 공연을 보았다.




“송이야, 발레 보러 갈래?”     

지연 언니의 취미는 발레 공연을 보는 것이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언니의 제안은 아주 색다른 것이어서, 냅다 받아들였다. 그렇게 생에 첫 발레 공연을 보게 되었다.

     

발레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거리로 표현하자면, 나와 발레는 개마고원과 땅끝마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있다. 자석으로 표현하자면 N극과 S극이다. 사실, 발레는 조금 접근하기 어려운 취미라고 생각했다. 대사 없이 음악과 몸짓으로만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가능한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뽐내는 두 시간 남짓의 공연에, 십만 원에 가까운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국립발레단은 아주 좋은 제도를 가지고 있다. 정기공연의 마지막 날에 해피 아워(Happy Hour)를 마련하고, 그 시간대에는 티켓을 거의 절반 가격에 판매한다. 더욱 많은 사람이 양질의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이번에 관람한 지젤(Giselle)은 순수한 시골 처녀와 귀족 남성의 비극적인 사랑을 담은 동화다. 스토리도 아주 간단했다. 생에 첫 발레 공연으로 부담 없이 즐기기 딱 좋은 공연이었다.



 

ActⅠ(1막)
순박한 시골 처녀 지젤은 마을을 찾아온 귀족 청년 알브레히트와 사랑에 빠진다. 알브레히트는 신분을 속이고 지젤에게 자신을 로이스라고 소개한다. 지젤을 사랑하는 사냥꾼 힐라리온은 알브레히트를 향해 질투심을 느끼고 그의 정체를 의심한다.

지젤은 가을 수확 축제의 여왕이 되어 춤을 추며 축제를 즐기지만, 지젤의 어머니는 심장이 약한 지젤을 걱정한다. 이때, 마을 근처에서 사냥하던 쿠르랑드 공작이 그의 딸이자 알브레히트의 약혼녀인 바틸드와 함께 휴식을 취하기 위해 지젤의 집 앞으로 찾아온다. 힐라리온은 알브레히트가 숨겨둔 칼을 찾아내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그의 정체를 폭로한다. 진실을 알게 된 지젤은 충격을 받아 죽게 된다.      


ActⅡ(2막)
깊은 밤, 숲 속의 음산한 무덤가에 하얀 그림자가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진다. 이 그림자는 연인에게 배신당해 죽은 처녀 귀신인 윌리다. 이들은 젊은 남자들을 숲으로 유인해 죽음에 이를 때까지 춤을 추게 한다. 오늘 윌리들의 여왕 미르타는 새로운 윌리가 된 지젤을 맞이한다.  

꽃을 들고 지젤의 무덤을 찾은 알브레히트는 그녀의 환영에 홀려 뒤쫓아 간다. 그 사이 무덤가를 찾은 힐라리온은 윌리들에 의해 죽는다. 알브레히트가 미르타의 명령으로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하자 지젤은 미르타에게 그를 살려달라고 간청한다. 지젤은 강력한 사랑의 힘으로 결국 알브레히트를 지켜낸다. 이윽고 새벽이 밝아오는 종소리가 울리자 지젤은 알브레히트와 영원히 이별하고 윌리들과 함께 무덤으로 사라진다.

- Giselle synopsis (출처: 국립발레단 홈페이지)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지젤의 연기가 인상 깊었다. 1막 중반까지 사랑에 빠진 명랑하고 순박한 시골 처녀의 모습, 1막 후반에서는 사랑하는 남자의 배신을 깨닫고 미쳐가는 비련의 여인, 2막에서는 슬픔을 가진 윌리의 모습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지 못하는 여인의 모습을 연기한다.


죽음에 이른 지젤의 모습 (출처: 국립발레단)


관람 전에 시놉시스를 읽지 않았어도 충분히 이해가 됐을 만큼 섬세한 지젤의 연기가 인상 깊었다. 손짓과 표정에서 풍부한 감정이 느껴졌다. 사랑에 빠진 설레고 풋풋한 시골 처녀의 마음을, 깃털처럼 가볍게 통통 튀는 발걸음에 맞춰 하늘거리는 치맛자락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알브레히트의 배신을 알고 마을 사람들 사이를 정처 없이 뛰어다니며 미쳐가는 모습에 내 마음이 미어질 것 같았다. 이내 쓰러지는 그녀의 모습은 가녀리고 안타까웠다.


2막은 1막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서 시작했다. 어두운 배경, 음울한 음악과 조명, 안개가 짙게 깔린 무덤가에서 요정의 발걸음으로 나타나는 윌리들의 군무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지젤의 의상과 몸짓도 청초함과 아련함이 묻어났다. 윌리에게 둘러싸여 죽음의 춤을 추는 알브레히트와 그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지켜주고자 하는 간절함을 담은 사랑의 춤을 추는 지젤의 모습에 마음을 다해 손뼉 쳤다. 내가 조금 더 적극적인 관람객이었다면 소리쳤을 것이다. 브라바(Brava)!



         

지젤, 그녀는 순수했다.

쾌활하고 명랑한 시골 처녀였다. 알브레히트가 아니었다면 자신과 같이 순수한 청년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곤 하나, 순수한 사랑이 사실은 거짓과 배신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죽음에 이르러버릴 정도로 그녀는 맑은 사람이었다.

   

알브레히트는 어떤가. 연출 중의 하나였겠지만, 죽은 지젤을 뒤로하고(아마 슬픔에 겨워서 그런 것이겠지만) 달아나는 알브레히트 뒤를 쫓아가고 싶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그게. 붙잡아서 다시 지젤을 살려내라고 다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시대에는 귀족과 평민의 사랑이 이루어지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래서 평민으로 위장해 지젤에게 접근했으리라. 여느 귀족이 그렇듯이 집안이 맺어준 약혼녀가 있을지라도 지젤을 마음을 다해 사랑했으리라. 하지만, 그가 얼마나 지젤을 마음을 다해 사랑했는지는 관계없이, 사실을 숨기고 지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비겁했다.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파드되(pas de deux) (출처: 국립발레단)


윌리가 되어서도 알브레히트를 지키려는 지젤의 사랑은 숭고했다. 알브레히트 또한 순수하게 그녀를 사랑했지만, 비겁했다. 정반대의 성질을 가졌지만, 애절하게 사랑했던 두 사람의 절절한 비극이 담긴 2막의 파드되(pas de deux; 흔히 발레에서, 두 사람이 추는 춤)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생에 첫 발레 공연을 지젤로 접한 것은 아주 행운이었다. 넌버블(nonverbal; 비언어적) 공연이 전할 수 있는 모든 감동을 알짜배기로 겪었던 즐거운 2시간이었다. 새로운 취미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다.


     

# 가장 인상 깊었던 두 사람의 파드되. 국립발레단의 영상을 찾지 못해, 영국 로열 발레단의 파드되 영상을 남긴다. 시간이 있다면 한번쯤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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