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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May 04. 2020

평생 곱씹을 책을 만난다는 것은.

공지영-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나는 다독가가 아니다. 

서점의 베스트셀러를 놓치지 않고 웬만한 작가의 주요 저서는 모두 섭렵한 성실한 다독가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게으른 것도 맞지만 (독서에 게으르다는 변명이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무엇보다 편독(偏讀)이 심하기 때문이다. 경영학도였지만 비즈니스/경영/경제 서적을 멀리하고 문학/에세이에 집착한다. 특정 작가에 열광하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예요?’는 질문을 받으면 주저 없이 대답한다. 공지영 작가님을 제일 좋아해요.


그녀의 책을 모두 읽어봤냐면 그건 아니다. 꾸준하고 활발하게 활동해주셔서 즐거움이 끊임없을 테지만, 아쉽게도 그녀를 알기 위한 내 노력이 부족했다.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우연히 만난 그녀의 에세이 속 글귀가 마음속 깊숙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평생을 곱씹을 책을 만나는 건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가능할까? 

나의 경우엔 위태로운 마음과 그것을 정확히 읽어내고 위로하는 책 속의 한 문장이었다. 23살의 나는 첫 이별 맞이를 호되게 하고 있었다. 그의 배신으로 끝난 관계인데도 그럴 리가 없다며 애써 외면하고 끝까지 매달리고 붙잡는 그런 짓을 했었다. 왜 그랬는지 이성적으로 절대 설명할 수 없지만, 그때는 그 수밖엔 없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마음에 심하게 지쳤지만 도저히 떨칠 수는 없어 괴로워하던 시기에 언니의 책장에서 공지영의 책을 발견했다.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어떤 외로움을 품어야 저런 문장을 만들 수 있을까? 그녀의 외로움을 알면 어쩌면 위로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이 용서하기 힘든 기억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다.


... 아주 오래전 비가 내리는 어느 거리에서 나 싫다는 사람을 따라가다가 그만 빗길에 미끄러져 우산도 놓쳐버린 채 한 길거리에서 엎어져 울고 있었던 나 같다고. 그때 나에게 신경질 부리고 나를 뿌리치고 그러다 못해 나를 지긋지긋해하는 그를 따라가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정말 그것이 사랑이었을까, 하고.


여기까지 읽었을 땐 책장을 덮어버리고만 싶었다. 철벅거리며 엎어져 있는 (아마도 어렸던) 그녀와 내 모습이 겹쳐지는 것만 같아서 외면하고 싶었다.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면 붙잡지 말아야 할 것을 뚜렷하게 알 수 있는데, 대체 무엇이 상처만 주는 이를 기어코 따라가게 만들었을까.


아마도 그것이 사랑은 아니었는지 모릅니다. 이대로 어이없이 헤어질 수는 없다는 망연함이었을까요? 그를 이대로 보내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조급함, 이렇게 버림받는 나를 받아들일 수도 용서할 수도 혹은 인정할 수도 없다는 심한 자괴감, 모욕감, 어쩌면 내가 한 번도 생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처참한 상실이 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데 대한 참을 수 없음, 자존심 따위도 버릴 만큼 두려웠던 내 앞의 생, 이런 것들이 그 빗속에서 뒤엉켜 있었을 테지요. 그러니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가졌던 그 마음이 사랑이었던가, 하고 말이지요.


망연함, 조급함, 자괴감, 모욕감, 상실, 두려움. 이런 단어가 쿡쿡 마음을 쑤셨다. 

정말 네가 사랑해서 그렇게 상처 받으며 버티고 있는 거야? 그건 누굴 위한 건데? 그렇게 버티면 결국에 남는 건 뭐가 있을까. 분명 옛날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이어온 관계가 그 순간 끝이 났다는 게 피부로 와 닿았다. 더 이상 사랑은 없고 단지 그를 잃어버린 후의 상실과 그것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모르는 겪어보지 못한 공포와 소중했던 추억이 무의미해진다는 허무감이 나를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가 나를 배신하며 잘라낸 끈을 홀로 생명줄이나 되는 냥 끌어당기다가, 끊어진 끝을 보고서야 이별을 받아들인 기분이었다. 사실 6년이 지난 지금 그에 대한 미움이 옅어지고 나니 추억 어딘가에는 그의 진심이 있었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때는 아예 그에 대한 모든 감정을 지워내려 했었다. 공지영의 글을 읽었던 그날 새벽, 사진과 오갔던 편지, 그리고 선물을 모조리 쓰레기통에 버렸다. 


첫 이별을 성숙하게 이겨내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던 나를 붙들어줬던 그녀의 글귀는 여전히 책장에 꽂혀있다. 오직 사랑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열정을 쏟던 일이 어그러졌을 때, 희망하던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을 때, 사람 관계에 지쳤을 때 그녀의 책을 편다. 그리고 형광펜으로 그어진 글귀를 읽고, 다시 읽고, 읽었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겪었던 고통을 조용히 잠재웠던 그 새벽처럼, 그 날의 용기 있었던 내 모습처럼 그녀의 글은 항상 용기를 북돋워준다. 


나는 다독가가 아니지만, 평생 곁에 두고 곱씹을 책을 만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이런 귀한 책을 쉽게 만날 순 없겠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읽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자고 슬쩍 다짐해본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 어딘가에는 또 게을러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아이고.


p.s. 커버는 요즘 새로운 취미로 삼은 필사의 모습. 글씨체가 썩 보기 좋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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