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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Jul 25. 2019

저어그, 제주濟州

장민승 & 정재일 「over there」


누군가 말했다. 제주의 어원이 ‘저어그’, 전라도에서 그렇게 불고 그래서 제주濟州가 되었다고...

저어기 over there, 그것은 피안이었다.


오버 데어 메인 포스터


누가 그러더라, '너는 왜 그렇게 다 늙은 것처럼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생각부터 하냐.'

그래서 생각을 줄여보고자 선택한 방법은 다른 생각을 하는 거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생각 말고, 즐겁고 건강한 생각을 하는 것.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생각은 원점으로 돌아와 버리기 마련이니까.


오늘도 마찬가지로 머리가 복잡했다.

엉킨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집에 가서 할 일을 '생각'했다. 퇴근 준비를 하는데, 옆자리 선배가 말했다.

"오늘 영화 상영한다는데 보고 갈래요?"

영화, 그것도 예술영화였다. 딱히 관심은 없었지만 집에 가서 또 생각이 꼬리잡기를 해 걱정으로 번질걸 생각하니(이제 생각이란 단어 좀 그만 쓰고 싶다..) 영화나 보자 싶어 따라갔다.



회사가 제작 지원한 영화라 임직원 대상으로 무료 상영을 해주는 자리였다. 좌석이 삼분의 이 정도 채워졌을 즘에 진행자가 영화에 대해 설명했다.

"감독은 관객이 이 영화에서 메시지를 발견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제주가 아닌, 1만 8천 신이 존재하는 영험하고 신비스러운 제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000일간 촬영된 우리가 몰랐던 제주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처음에는 보다가 지루하면 일찍 나가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안개가 걷히며 까만 숲의 윤곽을 드러내다가 숨기기를 반복할 때는 묘하게 화면에 집중하게 되었고, 새벽인지 저녁인지 모를 시간에 검정보다 진한 푸른 파도가 천천히, 동시에 세차게 내려칠 때는 잡아먹히는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에 와서야 드디어 깊은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런 표현은 식상한가 싶지만, 러닝 타임 내내 숨통이 조여드는 듯했다.



마른 나뭇가지 위를 눈보라가 지나간 화면 뒤에는 눈꽃이 맺혀 있었고, 너울거리는 안개는 부드럽게 제주를 숨겼다가 드러냈다가 했다. 웅장한 자연이지만 자칫 심심할 수도 있는 화면임에도 심장을 붙들고 보게 만드는 건, 영화의 러닝 타임과 같은 44분 동안 흐르는 오케스트라였다. 음악감독은 정재일, 「기생충」, 「옥자」의 음악을 만든 사람이다. 함께 간 선배는 영화 시작 전부터 정재일 이야기를 끊임없이 했는데, 요약하자면 그 사람은 천재야! 였다. 그렇구나, 하며 시큰둥했던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영화를 보면서 깨달았다.



곡소리 같기도 하고 비명 같기도 하고... 전반적으로 깔리는 여성의 판소리는 마치 제주의 목소리 같았다. 영험하고, 기이하고, 기묘한. 1만 8천 신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하나의 소리로 합쳐진 듯한 느낌이었다. 다큐멘터리에서 손에 땀을 쥐는 스릴을 느낄 수 있게 하다니, 그 사람은 정말 천재가 맞나 보다.



의외의 수확이었다. 확실한 건, 영화가 의도한 바대로 44분 내내 화면과 소리에 사로잡히느라 머릿속은 깨끗해졌다는 사실이다. 머릿속에는 생각을 밀어내는 다른 생각이 아니라, 눈에 가득 찼던 제주의 생겨남과 사라짐만 남았다. 상영관을 나오면서 선배와 이건 개인 소장해서 집에 틀어놔야 한다, 명상하기 딱 좋다 같은 얘기를 나눴다. 덕분에 할 일 몇 가지를 미뤄야 했지만, 어찌 됐든 좋은 시간이었다.


머릿속을 깨끗하게 씻어내고 싶은 분들은 추천드립니다.



# 상영관이 거의 없다. 아트홀 같은 곳에서 전국을 돌며 상영한다고 한다.

# 장민승 & 정재일 듀오는 '더 모먼츠'(2012), '보이스리스'(2014) 등 작업을 같이 하며 이미 입증된 실력 있는 예술가들. 비주얼은 장민승이, 음악은 정재일이. 이제야 알아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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