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버들송이 Jul 03. 2018

뭐든지 하거나, 무엇도 하지 않거나

무력감이 온몸을 감싸는 '정체기'에, 나는 둘 중 하나를 한다. 


태풍 쁘라삐룬이 한바탕 휩쓸고 있다.

태국어로 '비의 신'을 의미한다는 이 태풍은 신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매서운 빗줄기로 존재감을 뽐낸다. 이 시기에는 양말이 필요한 신발은 눈길도 주지 않는다. 맨발로 신을 수 있는, 비에 젖어도 끄떡없는, 굽이 낮은 샌들만 고수한다. 철벅철벅, 물에 젖어 무거운 발로 걸음을 옮긴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들어선 집 안에는 꿉꿉함이 가득하다. 안 그래도 끈적끈적한 몸에 꿉꿉한 공기가 닿으면 짜증이 확 난다.


기분이 더 나빠지기 전에 후다닥 옷을 벗어던지고 욕실로 들어간다. 덥긴 하지만 샤워는 항상 따뜻한 물로 한다.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나서 선풍기를 틀어놓고 침대에 누으면, 불과 30분 전에는 목 끝까지 차올랐던 불만과 짜증이 사르르 녹는다. 하필이면 장마 직전에 세탁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미리 처리하지 못한 빨래가 잔뜩이다. 이번 주는 내내 비가 오거나 흐릴 텐데, 세탁기는 고치더라도 산더미 같은 빨래는 언제 다 처리하나.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잡생각을 한다. 유독 큰 창문이 두 개나 있는 원룸이라, 빗줄기가 유리를 때리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툭, 투둑. 불규칙한 빗소리에 집중하고 있노라면 하루 종일 바빴던 머리가 잠시 쉰다. 




쏟아지는 비와 함께 찾아온 무력감이 온몸에 가득하다. 나는 이런 상태를 잘 안다. 이건 '정체기'다. 잊을만하면 불쑥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 정체기에는 뭘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책을 읽어도 문장을 겉돌고, 술을 딱 한잔만 마셔도 머리가 아프다. 화사한 옷을 입고 나가면 점심으로 먹은 떡볶이 국물이 튀고, 지하철 환승은 1분 차이로 놓친다. 쇼핑을 하려고 하면 도대체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없거나, 있더라도 품절이다. 대화를 나눌 때에도 흐름을 놓치기 일쑤다. 


Photo by Christian Hopkins


다행히 이번 정체기는 장마와 동시에 찾아와서, 이런 상태를 설명하기 좋은 이유가 있다. 비가 와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사실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게 정확하다. 그러면서 불안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불안해하는 일이 얼마나 의미 없는가. 그렇지만 나에게 의미 없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올해의 목표는 소설을 쓰는 것이다. 짧든 길든 나의 글을 써서 기고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뭐든 꾸준히 하면 된다는 믿음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글로 남기지만, 그렇다고 소설을 쓰지는 않는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쓸 수 없다는 게 맞는 말이다. 아직 부족하니까. 소설을 쓰고 싶으면서도 쓰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되면서 항상 불안했고, 어느새 온몸이 무력감으로 가득 찼다.




이런 시기를 몇 번 겪다 보면, 나름대로 이겨내는 법을 찾아내게 된다. 둘 중에 하나다. 뭐든지 하거나, 혹은 무엇도 하지 않거나. 뭐든지 하는 경우는 무력감이 몸을 지배하기 이전에 효과가 있다. 가벼운 우울이 느껴질 때면, 짧은 시간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낸다. 로맨스 소설을 세네 권 구매해서 단숨에 읽어내리는 것, 넷플릭스 드라마를 푹 빠져서 보는 것, 모바일 게임에 열중하는 것. 지금 보다 조금 더 어릴 때는 무작정 달렸다. 이어폰을 끼고 열심히 달리다 보면 머리가 깨끗하게 비워지는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Photo by Christian Hopkins


무엇도 하지 않는 경우는 정체기의 절정이다. 어떤 것에도 집중하기 힘든 시기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는데도 안대를 쓰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꼭 덮어쓰며 억지로 잠을 청하거나, 배가 충분히 부르지만 거짓 허기로 뭐든 먹고 싶은 시기. 이럴 때는 그저 그 순간이 지나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기분이 나아질 무언가를 무리하게 찾아내지 않고, 가만히 시간이 흘러가는 걸 바라본다. 마치 타인처럼, 나의 시간이지만 나의 시간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한 발 물러서서 지켜본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지만, 언젠가 끝이 난다. 그렇게 버티다 보면 나는 이전과 같이 편안한 상태가 된다.




우울증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했던 순간이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정체기에 대해 털어놓았을 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런 순간이 있다고 했다. 모두가 정체기를 마주한다고, 결코 나만 마주하는 위험한 시기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나의 우울을 외면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지도 말라고. 그 또한 다 지나갈 것이니까. 정체기를 별난 취급하지 않았던 무덤덤한 위로가 큰 도움이 되었다. 


정체기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선택을 할 것이다. 뭐든지 하거나, 무엇도 하지 않거나. 가끔씩 다가오는 어쩔 수 없는 그 시기를 나름의 방법으로 지내다 보면 어느새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있겠지. 툭, 투툭. 편안한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아야겠다. 그리고 내일 눈을 뜨면 이번 정체기도 어느새 끝나 있지 않을까.




※ 글에 삽입된 이미지는 Christian Hopkins의 우울증 연작(2차 출처: 허핑턴포스트)에서 가져왔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벚꽃의 꽃말은 설렘, 그리고 그리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