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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원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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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Sep 13. 2020

천국은 내 품 안에 있다

영춘 일기 1


대구는 비가 내렸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의 그 가랑비가 부슬부슬 오고 있었다. 그걸 보니 아차 싶었다. 3시간 전 서울에서 집을 나설 때 이미 하늘은 우중충했다. 기차 시간에 초조했던 나는 새벽에 내렸던 비의 잔재겠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기차역으로 향했다. 이러다 또 한 번 쓰고 잃어버릴 우산을 사고 말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오늘의 모든 우선순위는 영춘이를 데리고 오는 데 있었다. 기차 시간에 늦지 않는 게 급했기에 허튼 돈을 조금 쓰든 이 정도 비를 맞든 모두 상관없었다.




대구로 내려갈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두려움 반, 걱정 반이었다. 설렘은 그들 밑에 묻혀 드러나지 않았다. 영춘이 혹여나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처럼 밥이나 물을 안 먹어서 속을 무진장 썩이거나, 몸이 단단히 아픈 구석이 있거나 하면 어쩌지 같은 안 좋은 생각만 가득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어떤 문제가 일어나더라도 감수해야 했다. 지레 겁먹지 말자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영춘, 그러니까 리치가 사는 집으로 향했다. (서울로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리치라고 표현하겠다. 전 집사님의 애정에 예의를 표하며.)


벨이 울리고 들어서자마자 5살 된 요크셔테리어 사랑이와 4개월 된 러시안 블루 리치가 반갑게 맞이했다. 아니, 사랑이는 나를 맞이하며 꼬리를 흔들고 살갑게 다가왔지만, 리치는 틈을 놓치지 않고 현관을 쏙 빠져나가 빌라 계단으로 훌쩍 올라갔다. 입양 전, 방묘창이 꼭 필요하다는 주의 글을 고양이 카페에서 수십 개 읽은 나는 순간 패닉에 빠져 '으악!' 했고, 전 집사님은 태연하고 능숙하게 '잠깐만요' 하시더니 계단을 얼마 올라가지도 못하고 (리치는 쫄보다) 망설이던 리치를 잡아오셨다. 그 모습을 보니, 난 절대 태연해질 수 없고 리치는 항상 나보다 빠를 테니, 무조건 방묘창과 방묘문은 필수라는 확신이 생겼다.


전 집사님의 눈시울이 벌겠다. 리치를 보내는 날 아침부터 많이 우셨던 모양이고, 사용하던 모래와 사료를 챙겨주며 리치가 얼마나 예쁜 아이인지 말씀하실 땐 목소리에서도 울음이 묻어났다. 나는 리치를 데려가는 입장이면서도 코 끝이 시큰거렸다. 전 집사님에게 오기 전에 다른 집사 분도 계셨는데, 그분은 리치를 집 근처 펫 샵에서 데리고 왔다고 한다. 3개월까지 펫 샵의 투명하고 작은 아크릴 판에 갇혀 있던 리치는 한 달 만에 세 번째 집사인 나를 만나게 되었다. 전 집사님은 함께 했던 2주 동안 모든 정을 줘버렸지만, 리치보다 먼저 품은 5살 된 요크셔테리어 사랑이가 리치의 존재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아 파양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입양을 주선해 준 D 씨는 (약간 복잡하지만) 전 집사분의 친구의 조카였고, D 씨는 3마리의 반려묘를 기르는 입장에서 깐깐한 기준을 토대로 입양자를 선정했다고 한다. 초보 집사에 거주지도 먼 나로서는, 선택받은 게 운명이라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리치는 아주 활발했다. 사랑이가 싫어하든 말든 끊임없이 장난을 걸고 인형을 물어뜯었다. 전 집사님이 챙겨준 리치의 사료 포대에는 무수한 이빨 자국이 있었다. (ㅋㅋ) 그리고 얌전했다. 이동장에 들어가기 싫어할까 봐 비장의 무기 캣잎가루도 챙겨 왔건만, 리치는 애옹 몇 번 울더니 얌전히 이동장에 들어갔다. 이동장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게 다행이면서도 왜 짠한지, 리치의 과거를 들어서 그런 건지. 전 집사님은 리치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으시다며 기차역까지 태워다 주셨다.

카메라를 켜니 다리를 곧게 펴 자세를 잡는다. 묘델!

차 안에서 리치의 이동장을 열어줬는데, 부릉 거리는 진동이 무서울 법도 한데 의젓하게 흔들리지 않고 잘 있는 모습에 이런 천사가 어디 있나, 감탄이 절로 나왔다. 차 안에서 리치는 나에게 무척이나 살가웠다. 골골송을 부르며 몸을 비비더니, 이내 내 품에 쏙 안겨서 꾹꾹이를 하는 게 아닌가... 그 순간 천국이 내 품 안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기록인데, 꾹꾹이 하는 리치를 보며 전 집사님도 깜짝 놀라 "얘가 이렇게나 살가워? 어머 신기해!" 하며 사진을 찍으셨다. 리치가 좋아하는 집사한테 가서 사랑받고 살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놓이신다며. 전 집사님은 밝은 미소로 리치를 배웅하시다가 결국, 기차가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눈물을 보이셨다. 열리지 않는 창문 너머로 이동장 안의 리치를 보며 울먹이시던 모습에 덩달아 눈이 시큰해졌다. 이렇게 예쁜 아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심정이 얼마나 미어질까.


기차에선 자리 표를 끊었음에도 내내 휴게공간의 간이 좌석에 앉아 올 수밖에 없었다. 리치, 아니 영춘이가 언제 울지 몰라 옆 승객에게 피해를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춘이는 정말 늠름했다. 대구에서 서울까지 오는 2시간 반 정도를 고작 두세 번 울음 하고 말았다. 물론, 서울역에서 집으로 오는 택시에서도 종종 불룩이는 이동장이 아니었다면 그 안에 영춘이 있는 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집에 와서, 혹시 몰라 모든 창을 꾹 걸어 잠그고 (대구에서 영춘이 훅 뛰어나가던 순간 철렁했던 심장의 영향이다) 이동장을 슬그머니 열었다. 한동안은 안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나의 영춘! 자연스럽게 집안 곳곳을 탐색했다. 이건 뭐지? 무슨 냄새가 나지? 올라가 볼까? 아냐, 좀 있다가. 아, 반려동물의 생각을 읽어준다는 말도 안 되는 기계를 사는 집사의 심리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영춘아, 너의 모든 궁금증을 함께 하고 싶어.


미리 준비 못 했던 모래를 부랴부랴 동물 병원에서 사 와서 화장실을 만들어줬다. 그랬더니, 많이 참았던 듯 큼직한 감자를 생성해내는 영춘이. 고양이의 우주라는 화장실을 내 집에서 편히 사용해 줬다는 것만으로 어찌나 고마운지.



정말 잘 준비했다 싶었던 것은, 파란 애벌레 인형과 작은 방울이 달린 카샤 카샤다. 영춘이는 오자마자 그 장난감에 눈을 빛내더니 한 시간에 한두 번씩 장난감을 툭툭 치며 놀아달라 요구했다. 귀여워... 세상에 어느 누가 그 모습을 보고 외면할 수 있을까? 삼십 분 텀으로 십 분씩 놀아줬더니 지금 어깨가 결리다. 요즘에는 일할 때도 안 결리는 어깨가 말이다. 영춘 일기를 쓰는 이 순간에도 딸랑이는 소리가 나서 봤더니, 카샤 카샤를 물고 발밑에 왔다. 이 지지배... 그렇게 보면 대체 누가 널 외면할까? 한바탕 놀아주고 왔다.


성묘가 되고 나면 아기 고양이 시절이 무척 그리울 거라고들 한다. 마치, 부모가 자식이 천천히 크기를 바라는 것처럼. 영춘이가 딱 이 시점에 나를 만난 것도, 우리가 함께 하게 된 것도 지나고 나면 운명 같겠지. 나중에 후회하는 일 없도록 영춘이를 아낌없이 사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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