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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원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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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송이 Oct 25. 2020

고양이와 이사하기

영춘 일기 3


영춘이를 데리고 오기 전에 이미 이사가 결정됐다. 집주인이 바뀌었고, 새로운 주인은 집의 사용처가 있으니 최대한 빨리 이사 가주길 원했다. 나도 더 쾌적한 환경으로 이사 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지라, 계약 만료 8개월 전에 먼저 나가는 것으로 합의했다. 본격적으로 집을 알아보러 다니기 직전에 영춘이를 데려오기로 했다. 그래서인지 당연하게도 ‘반려동물을 기를 수 있는지’, ‘캣타워와 화장실은 어디 놓을지’가 집을 보는 기준이 되었다.


부동산 정책이 휩쓸고 간 주거 시장엔 원하는 조건의 마땅한 전세 매물이 없었다. 있다면, 예산을 훨씬 웃돌았다. 혹여나 집을 제 때 구하지 못하면 어쩌나 무거운 마음에 일주일 정도 보냈을까, 친한 언니가 소개해 준 중개사를 통해 마음에 쏙 드는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전세 값이 예산을 웃돌았지만, 무리해서 집을 계약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넓은 베란다에는 큰 창이 나있고, 그 밖으로는 푸른 공원과 빌라를 드나드는 사람들과 움직이는 자동차가 보였다. 인간과 함께 살기 위해 하루 종일 집 안에 갇혀 지내야 하는 고양이에게 창은 TV와 같다고 한다. 집을 구할 시점엔 아직 영춘이를 만나지도 못했지만, 그 애가 베란다에 놓인 캣타워에서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쬐고, 풍경을 구경할 모습이 이미 눈에 선했다. 무엇보다 이 건물은 반려동물에 매우 관대했다. 나 외에도 웰시코기, 고양이 등 반려동물을 기르는 가구를 심심찮게 마주칠 수 있었다. 숨어 사는 기분을 느끼지 않고 편하게 영춘이와 살 수 있을 거란 강한 예감이 들었다. 계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돈은 다른 데에서 더 아끼면 되니까.


이사하기 전 영춘이와 원룸에서 3주 정도 지냈다. 주문한 캣타워는 이삿날에 맞춰 새 집으로 오기로 했기에, 임의로 박스를 쌓아 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줬었다. 만족스럽진 않았겠지만 영춘이는 싫은 내색 하지 않고(적극적으로 싫었지만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그곳에서 잘 지내주었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놀고, 잘 자고. 1.7킬로로 나에게 왔던 영춘이는 그 3주 간 무럭무럭 자라 2.1킬로가 되었다.


이사 일주일 전부터 조금씩 집을 정리했다. 이사 준비 기간에 맞춰 재택근무가 종료되었고, 오랜만의 정상 출근에 몸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퇴근 후엔 새벽까지 짐을 정리하면서 피로는 가득하고 신경은 잔뜩 예민했다. 영춘이와 충분히 놀아주지 못해 미안했는데, 내가 여기저기 늘어놓는 짐이 그 애에겐 놀이공원이었나 보다. 이것저것 다 건드려보고 깨물어보고 체취도 묻히면서 나름 재미나게 보냈다. 못난 언니는 그런 영춘에게 방해하지 말라고 성질을 부렸다. 그런 못된 언니는 영춘이 이빨에 몇 번 깨물리는 것으로 대가를 치렀다.


고양이와 이사하는 것은 혼자 이사하는 것보다 더욱 꼼꼼해야 한다. 이사를 하는 동안 고양이가 불안해하지 않게끔 잠깐 머무를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야 하고, 그 시간 동안 먹고 자고 싸는 게 힘들지 않게 해줘야 한다. 이사 전 날, 새 집에 잠깐 들러 영춘이가 반나절 동안 먹을 캔과 숨숨집, 스크래쳐를 두고 왔다. 그리고 이삿날 당일 새벽에 영춘이를 먼저 데려다 놓을 생각이었다. 새로운 집과 거리가 멀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리고, 이사 전날 나는 잠에 들지 못했다.


짐이 들어 오기 전,비어있는 새 집을 탐험 중이다.


마무리되지 못한 일이 있으면 항상 그렇듯이, 새벽 내내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깼다. 짐을 제대로 챙겼는지, 제시간에 맞춰 일어날 수 있을지, 그런 자잘한 생각이 겹쳐 곤두선 신경이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매번 이사할 때마다 있던 일이라 그렇겠거니 했지만, 이번엔 영춘이가 걱정되어서 유독 힘들었다. 뾰족하게 문제 될 것이 떠오르진 않지만 일이 마무리되기 전까진 계속 불안한 마음이 들 것이었다.


새벽에 깼을 때, 뻑뻑한 눈을 뜨지도 못한 채 시간을 보기 위해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찾는데, 문득 손가락에 폭신한 것이 걸렸다. 영춘의 털이었다. 잠을 잘 땐 보통 스탠드 거울 뒤쪽이나 숨숨집 같이 어두운 구석을 즐겨 찾는 영춘이가 왜인지 내 머리맡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영춘의 배 아래 들어간 내 손을 빼내지도 않고, 어둠 속에서 더욱 동그란 눈을 뜨고 나를 지긋이 보고 있었다.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손을 그대로 둔 채 다시 눈을 감았다. 영춘이는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손 끝이 포근한 털에 감싸인 채 새벽에 다시 몇 번 깼을 때도 영춘이는 그 자리 그대로였다. 영춘도 깨서 눈을 마주치기도 했고, 그대로 자는 채이기도 했다. 이 고양이는 내 불안을 읽는 걸까. 평생 영춘이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겠지만 (절실히 알고 싶다) 그 순간은 나한테 괜찮으니 좀 자라고 근엄하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아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으면서도 웃겼다. 해를 본 지 5개월밖에 안 된 아기 고양이도 두 번의 파양과 세 번의 이사를 겸허히 감당하는데, 30년 가까이나 살아낸 어른 인간은 이미 7번이나 감당해 본 이사에서 혹여나 뭔가 잘못될까 전전긍긍한다는 게 시트콤처럼 느껴지는 거다. 덕분에 한 결 가벼운 마음으로 그 밤을 났다.


머리맡 베개 위에 자리 잡은 영춘


역시나 이사는 순조로웠다. 이삿짐 기사님께 “센터에서 나오셨어요?”하는 칭찬이라고 하기엔 나는 센터 직원이 아니고, 일반 문이라고 하기엔 그의 어조가 매우 감탄이 담긴,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삿짐을 날랐다. 목표는 하나였다. 어서 빨리 영춘이가 감금된 베란다를 개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외부인을 내보내고 영춘이가 돌아다녀도 위험하지 않게끔 최대한 이삿짐을 정리해야 했다.


임시 거처에서 열심히 스크래쳐를 긁는 영춘


이삿짐을 한창 나를 때 타이밍 좋게 캣타워도 도착해서 설치했다. 영춘이가 얼마나 좋아할지, 혹은 불안해하진 않을지,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베란다를 열어주었을 때, 영춘이는 화장실로 직행했다. 인간의 화장실, 그중에서 판판하고 냉기를 머금은 그 타일의 감촉이 영춘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어떻게 거기 타일이 있는 줄 알았는지 모르겠다. 아직 아기라서 그런지, 영춘이는 걱정과는 다르게 순조롭게 새로운 집에 적응했다. 구석구석 킁킁거리고 툭툭 건드리며 탐색하는 시간을 얼추 갖다가 바로 제 집인 양 누비고 다녔다. 고맙게 문제없이 이사해준 영춘이가 고맙긴 한데, 언니가 정리하는 짐마다 훈수를 두고 다녀서 혼났다. 어찌나 장난감을 물고 와서 놀라 달라하는지, 정리하는 와중에 다칠까 덜컥하다가도 낚싯대를 문 불룩한 입모양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다음 이사에는 영춘이가 숨겨둔 장난감이 곳곳에서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전 집에서 사라진 생강과 파 인형은 결국 못 찾았다. 어디로 간 걸까.) 그럼 정말 귀엽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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