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꿀꿀한 날씨

by 부뚜막위고양이

어느 날은 구름이 가득 낀 날이었다. 날이 하루 종일 흐리고 습하기만 해 새벽이 돼서야 비가 내렸었다. 오전부터 체한 듯한 창백한 하늘이 지속됐다. 무거운 몸에 무거운 짐, 거기에 한 손은 우산을 잡고 다녀야 했다. 몸집이 좀 커서 2단 우산을 쓰면 머리 빼고 홀닥 젖기 마련이다. 그래서 항상 장우산을 들고 다닌다. 회색 콘크리트 건물 엘리베이터에 나오면 항상 푸른 하늘을 바라봤지만 오늘은 회색에 또 회색을 더한 하늘이라 높은 회색 건물의 지붕 같았다. 별 수 있나 상상 속에 존재하는 맑은 하늘을 그리며 걸을 수밖에. 누가 그러더라 인생은 비 오는 날에도 웃을 줄 알아야 한다고. 안다. 웃고 싶지 누가 우울하고 싶어 하겠나. 하지만 난 지금 우울한 것을. 단지 하늘의 색에 변하는 나의 감정이지만 그만큼 소중하고 예민한 존재다. 나란 인간이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도저히 재미없는 쳇바퀴 같은 풍경을 보고 싶지 않아 카페에 들어갔다. 그나마 맑은 노래와 커피 볶은 냄새, 다양한 색채가 우울을 눌러주기 좋았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기 전의 날씨라 조금은 쌀쌀해졌지만 여전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꾸준히 팔려 나갔다. 나도 용기 내 차가운 음료를 생각했지만 따뜻한 온기가 더 필요했다. 주저 없이 따뜻한 라떼를 주문하려 했지만 달달한 헤이즐넛과 바닐라 시럽을 넣을까 생각했다. 평소엔 시럽을 넣지 않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달콤한 맛이 필요했다. 어렵사리 바닐라 라떼로 주문하고 (헤이즐넛 시럽을 골랐지만 취소하고 바닐라 시럽으로 바꿨다. 일에 능숙한 직원이 내 갈팡질팡한 주문을 환불 절차를 밟지 않고 바꿔줬다.) 주문 뒤에 창 밖 자리에 앉았다. 카페 안과 밖의 풍경을 번갈아 바라봤다. 안과 밖의 경계에 앉아 같은 자리에서 다른 두 공간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안은 추운 날씨를 대비해 따뜻한 색채들이 가득했다. 갈색 벽면에 양한 추상화와 크로키들, 그 밑엔 고동색 의자와 책상들이 있고 그 옆엔 이끼 색 (적당히 어둡고 초록끼가 도는 색이다.) 책장엔 점장의 취향이 담긴 책들이 꽂혀있었다. 밖에선 회색을 가볍게 무시하듯 다양한 색의 옷이 눈에 띄었다. 젊은 멋쟁이의 초록색 패딩이, 나이 지긋하신 할머님의 꽃무늬 재킷, 아이보리색 코트를 입은 회사원 등 우울한 날씨를 이겨내기 위해 혹은 이런 우중충한 날 더욱 색의 빛을 내기 위해 입은 것처럼 잘 어울렸다. 잠시 생각에 잠겨 내가 주문한 라떼가 나왔다는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행인이 라떼를 들고 다니지 않았다면 난 차갑게 식은 라떼를 마실 뻔했다. 급히 걸음을 옮겨 주문한 라떼를 받으러 갔다. 째릿한 눈빛을 보내는 직원의 눈치로는 나온 지 쫌 된 모양이다. 라떼를 들고 다시 내 자리에 앉았다. 평소라면 씁쓸하고 고소한 라떼의 맛이지만, 오늘은 시럽의 향과 맛이 먼저 느껴졌다. 몸이 차가웠는지 라떼 한 모금이 내 몸 어디를 지나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이 기분이 제일 좋다. 식도, 가슴, 윗배, 아랫배 순서로 천천히 내려가 내 몸을 데워주며 마지막 아랫배에선 그 온기를 머금고 있는 이 온기. 이 온기를 기억해야겠다. 잔이 비어갈수록 내 몸은 따뜻한 온기가 채워졌고 잔이 완전히 비웠을 땐 다시 길을 걸을 기운이 났다. 다시 회색 배경에 몸을 담아 걸었다. 점심시간인지 회사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제희 음식점에 자리를 잡고 분주히 메뉴를 고르고 식사시간은 고작 15분 정도 될까? 하긴 점심시간 1시간에 15분이면 꽤 투자한 거지. 회사원들은 음식점에 나와 자연스레 카페인을 찾는다. 카페 직원들은 분주하게 점심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한다. 이런 상황이 꽤나 익숙한 몸놀림이다. 조용하고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어수선하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적게는 2명 많게는 6명씩 손님들이 왔다 갔다를 반복하니 어느새 카페는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카페 직원들은 잠시 숨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밖을 나와 뭘 먹은 거라곤 바닐라 라떼 한 잔뿐이다. 아무 식당에 들어가 아무 자리부터 앉았다. 네모난 식탁 위에 휴지곽과 향신료 통이 있고 식탁 옆엔 수저통이 있다. 현재 시간은 3시 43분. 나는 지금이 점심이니 점심메뉴를 골랐다. 제육볶음. 퉁명한 목소리로 메뉴를 받아가시곤 상당히 능숙한 몸놀림으로 물과 밑반찬을 주셨다. 시금치 무침과 김치, 어묵 볶음 그리고 김을 주셨다. 대한민국 식당에선 다 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비슷한 반찬들이 나온다. 10분 뒤 뻘건 색깔의 제육볶음이 등장했다. 냄새는 꽤나 그럴싸했다. 상추와 마늘 고추도 주셨다. 배가 꽤 고팠는지 닥치는 대로 집어 먹었다. 밑반찬의 간이 예술이었다. 제육도 매콤 달달해서 회사원한테 인기가 많은 메뉴다. 쌈을 싸 먹을 댄 고추와 마늘이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다행히 밥은 무한리필이라니. 행복했다. 다시 한번 기운을 북돋았다. (사실 너무 북돋았다.)

길을 걸으면서 집에 꽂을 꽃을 좀 봤다. 꽃이 주는 행복을 모를 때는 굳이 피곤하게 꽃을 주기적으로 사주면서 관리를 해주는지 이해가 안 됐지만 지금은 내 삶에 행복이다. 집안에 꽃은 공간을 밝혀주고 채워줬다. 그 뒤로 꾸준히 꽃을 사다 집에 뒀다. 특히 데이지라는 꽃을 좋아하는데 노란색 주위로 새하얀 꽃잎이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 정말 귀엽고 예쁘다 생각했다. 가뜩이나 짐이 많은데 무슨 꽃을 사냐고 한다면 나라는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거다. 필요하다면 최대로, 필요하지 않다면 최소한으로 이게 내 소비습관이다. 그러니 지금은 피곤하고 무겁고 귀찮더라도 이 데이지 꽃을 사야 한다. 출발하기 전보다 무겁고 거추장스럽지만 내 마음과 표정은 밝아졌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편의점에서 맥주를 구매했다. 네 캔에 만원. 좋다. 딱 이틀 치다. 하루에 두 캔씩 마신다면 적당하다. 밖에서 한아름 들고 온 짐을 풀고 정리를 한 뒤 목욕을 한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틀어 흥겨워지고 좋은 향이 나는 샴푸와 바디워시. 씻고 나와 스킨, 로션을 발라주면 개운하고 행복하다. 창 밖을 보니 타닥타닥 뚝뚝 소리와 함께 비가 쏟아졌다.

길거리를 바라보니 누군가는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는지 뛰기 시작했고 거리는 천천히 우산들이 가득 찼다. 빗소리에 어울리는 가수의 노래를 틀고 창 밖을 바라봤다. 규칙적이면서 어쩔 때는 불규칙한 빗소리와 노래가 잘 어울렸다. 맞다. 맥주를 사 왔었다. 맥주를 마시며 창 밖의 비를 구경했다. 타닥타닥. 자연스러운 빗소리와 쌉쌀한 맥주의 맛이 좋았다. 오늘 사와 싱싱한 모습의 데이지. 그리고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취기가 잘 어우러졌다.


타닥타닥. 뚝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