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것과 얻은 것
쨍했던 날이 어느덧 선선한 바람이 서서히 불어오는 8월 어느 날. 아버지께선 대장 내시경을 받고 대학 병원에서 추가로 검사받아보라는 얘기가 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단순한 위염이나 장염이라 생각했던 터라 나도 아버지도 대수롭지 않게 검사를 받았다. 시간이 흘려 9월 초. 검사 결과를 확인하라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 근데 뜬금없이 혈액종양내과를 내원하라는 문자였다. 그때 내 나이 21살 철없고 귀찮은 마음에 가벼운 병이라 생각하고 아버지 혼자 다녀와도 되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근데 내 생각과 다르게 아버지는 꽤나 진지한 표정에서 이내 막막한 표정으로 바꿨다. 난 거기에 아무 말 토 달지 않고 병원 가는 길을 따라나섰다. 그 표정으로 보고 내 철없는 말을 뱉으면 안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병원 가는 내내 “이상하다. 내가 왜 혈액종양내과를 가지?”라는 말을 연신 내뱉으셨다. 아마도 불안과 뜻하지 않는 큰 병이 걸렸다는 의구심이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병원에 도착해 곧장 병원에 들어가 혈액종양내과를 찾았다. 본관엔 찾을 수 없었고 한참을 헤매다 겨우 찾았다. 암 센터에 혈액종양내과가 있었다. 불길했다. 암이라니. 아마 병원에서 아버지한테 꽤 단단히 경고를 줄 요량으로 불렀겠거니 했다. 하지만 나와는 다르게 아버지는 표정이 굳으셨다. 원무과에 도착해 환자 이름과 보호자 이름을 썼다. 어색했다. 항상 환자 이름에 내 이름이, 보호자 이름엔 부모님 이름을 적었는데 뒤바뀌다니. 철없는 성인이 처음으로 느낀 성인이란 무게를 조금은 실감하는 날이었다. 암 병동은 꽤나 우중충 했다. 조명과 청명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표정에선 항상 안개가 둥둥 떠다녔다. 낯설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곳이 현실로 다가오다니. 그날은 추석 연휴가 지난 바로 다음날이라 사람들이 더욱 많았다. 예약을 했음에도 대기시간도 꽤 길었다. 불안한 예감만큼 막막한 침묵을 지킨 채 순서를 기다렸다. 드디어 진료 차례가 됐다. 들어가자마자 의사 선생님이 보였다. 털이 꽤 많으셨다 소매에 드러나는 털들과 턱에 붙은 거뭇거뭇한 선들이 또렷하셨다. 눈매는 좀 부리부리한 정도였다. 오늘도 의사 선생님께 적당히 혼나다 돌아갈 생각을 했다. 의사 선생님께서 처음 뱉으신 말은 “암입니다.”였다. 아무래도 암 병동에서 진료를 보는 분이니 암이란 단어가 친근할지 모르겠지만 아버지께선 59년 만에 누군가가 자신에게 암이라고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나 또한 어안이 벙벙했다. 아? 내가 알던 그 암? 캔서? 아? 정도였다. 아직 결과가 자세하게 나오진 않았다는 얘기와 혈액암에 대한 얘기를 해주셨다. 하나는 입원하면서 항암치료를 받으셔야 한다. 둘은 통원 치료하면서 항암치료를 받으셔야 한다. 하나는 악성 둘은 조금은 덜한 병이었나 보다. 자세하게 검사 중이니 1시간 정도 기다려달라는 말과 함께 다시 순서를 기다리게 됐다. 대기석에 앉아 아무 말 못 했다. 아니. 하면 안 될 거 같았다. 아버지는 무표정과 한숨을 내뱉으셨지만 마음속에선 최선을 다해 무언갈 참고 있는 듯했다. 나 또한 가슴에 응어리가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기다리는 내내 무겁고 답답한 기분이 계속됐다. 다시 우리 순서가 됐고 무거운 마음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께선 그나마 다행히 악성은 피했고 림프종이라고 하셨다. 난 그 말에 응어리진 마음이 사르르 풀렸지만 아버진 아니었나 보다. 그 말보단 암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꽉 채운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암이라는 병은 남 일처럼 여겨오셨다. 항상 건강하다 자부했던 몸이 어느새 늙어 암이라는 병이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으니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아버지는 희한하게 그 사실을 엄마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 아니 같이 살면서 어떻게 그걸 모르게 산단 말인가. 난 어차피 알게 될 거 본인 입으로는 죽어도 말 안 할 요령이었으므로 내가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암 이래.”
이 말을 하자 당연히 침묵이 흘렀다. 나도 엄마도 그다음 말이 나오질 않았다. 순간 전화가 끊긴 줄 알고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봤지만 통화는 정상적으로 연결돼 있었다.
“림프종이래. 심한 건 아닌데.”
난 순간 엄마가 울고 있을 줄 알았다. 아마 충격이 크겠지라는 짐작으로 달래듯 말했다. 림프종이란 말이 나오자 바로 보험부터 알아본 모양이다.
“아 림프종? 다행히 심하진 않고?”
충격을 받지도 슬픔에 빠지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오히려 나보다 더 씩씩한 목소리라 당황했다.
할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시고 아마 부모님은 암질환 보험에 집중적으로 가입을 하셨다고 들은 적이 있다. 아무래도 십몇 년간 보험금을 낸 이유를 오늘 제대로 뽕 뽑을 작정을 하려고 했나 보다. 엄마는 알았다는 말과 이따가 아버지한테 전화하겠다는 말과 함께 끊었다. 원무과로 돌아와 아버지한테로 가니 이미 내가 엄마한테 전화한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퉁명스럽게 뭐하러 전화하냐는 말에 그럼 아예 말 안 하고 숨기고 살 거냐는 말로 대꾸했다. 그 뒤로 무슨 말을 하지 못했다.
진료와 검사를 받고 나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나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그럴 맘이 조금도 없었다. 밑에 식당에서 짜장면과 빵을 드시곤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말을 남기곤 10분 뒤 돌아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슬쩍 담배냄새가 났다. 우리 아버지는 좋게 말하자면 애연가, 현실적으론 골초에 가까웠다. 암 판정을 받아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다시 담배를 피웠다. 아까 진료실 앞에서 짓던 표정과 여태 내내 봐왔던 표정과는 다르게 담배를 입에 댄 순간 행복했는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암 환자가 담배를 입에 댄 것에 대한 약간의 민망함이 있는지 내 눈치를 살피는 표정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정신이 있냐로 시작해 여태 있었던 일들을 줄줄이 읊으려다 참았다. 참 고생 많이 하고 사신 분인데 사소한 담배로 핀잔을 주기엔 내가 너무 민망했고 그렇다고 담배를 피우게 두는 자식이 또 맞는 건가 싶었다.
병원을 나오니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아버지 명치 안 쪽엔 암 덩어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알고는 꽤 다른 일상이지만.
총 3년간 통원치료로 항암치료를 받으셨다. 아픈 만큼 예민했고 평생 친구인 술과 담배가 더욱더 절친으로 지낸 시기임에도 항암치료는 꾸준히 받으셨다. 머리가 다 빠져 가발을 구매하셨지만 역시나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맨머리로 다니셨다. 그 뒤로 부쩍 외모에 더 신경 쓰셨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참 많이도 싸웠던 시간이 지나고 지금은 말끔하다는 진단을 받으셨지만 몇 년간 지켜봐야 한다는 말과 제발 술, 담배는 멀리하라는 말을 들으셨지만 역시 소 귀에 경 읽기 아니겠는가. 난 아직도 자식의 딜레마에 빠져있다. 아프셨으니 이젠 정신 차리고 술 담배를 멀리하라고 잔소리를 할지, 어차피 아버지의 인생은 아비저의 몫이니 그냥 둘까. 한편으론 암울하다. 친한 게 사람이 아닌 술과 담배라는 게 누군가에게 터 놓고 말하는 시간보다 술과 담배연기로 속으로 삼키는 일이 많았던 인생이 결국은 암이라는 결과라는 게 비통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림프종(아버지께서 겪으신)은 암중에서도 치사율이 높지 않은 편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렇게 위중한 병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지 모르겠다. ‘라고 한 적이 있었다. 본인 인생에 암이라는 게 나타나면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머리가 다 빠지고 살도 빠진 모습을 보며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몇이 있을까. 항암치료를 받으며 자신의 일을 놓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찬 바람 더운 바람 가리지 않고 일을 하셨던 아버지에게 누군가가 그랬다는 말에 처음엔 화가 났지만 그걸 버텨내고 지금은 대수롭지 않다는 말을 하신걸 보면 조금은 맘이 놓인다.
지금은 아직도 애연가에 애주가시다. 뭐 인생 뭐 있냐는 말과 함께 별로 무섭지 않은 듯 말씀하시지만, 또 몸은 엄청 생각해 보약은 수시로 드신다. 몸에 좋다는 건 찾아다니면서 드시면서 반대로 몸에 좋지 않은 걸 끊지 못하는 상태. 이 무슨 음양조화란 말인가. 쨍하고 볕이 들어올 날을 바라며 살 나이는 지났다고 하지만 그 말을 하시면서 서운함이 묻어 있음을 안다. 이 글이 조금이라도 그 마음에 닿아 서운함이 조금은 가셨으면 한 마음으로 썼지만 모르겠다.
아버지가 아프신 이후로 엄마가 꽤 고생하셨다. 갖은 히스테리. 사람이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에 더 슬픔에 잠긴다. 내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견뎌야 한다. 물론 아픈 사람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옆에 있는 사람이 잘 보필해야 된다는 말이 지당한 말이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옆에 있는 게 사실 고역이다. 사람마다 경중의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 아버지에 경우 예민한 편에 속했다. 게다가 자신의 건강에 자만하셨던 분이 암이라는 병에 걸렸으니 오죽할까. 거기에 한 끼에 밥 3,4 공기를 드셨다. 원래 대식가셨지만 아프신 뒤로 더욱 대식가가 되셨다. 사람이 아프면 본능적으로 식사를 잘 챙겨 먹으려고 하는 건지 몰라도 식사량이 3배 가까이 늘었다. 그 식사량을 맞추기 위해 엄마가 꽤나 고생하셨다. 아픈 사람도 힘들지만 그 곁을 지키는 것도 힘들다는 말이 그다지 와닿지 않았는데 이번에 제대로 알게 됐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병이 찾아왔고 그걸 받아들이기 위해 몸무림 쳤다. 병에 걸린 사람도 그 옆을 지키는 사람도 그 사실을 인정하는데 3년이 걸렸다. 그 3년이 서로에게 큰 상처도 줬지만 결국은 치료를 마치고 다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식탁이 우리 가족을 반겨줬다. 일상에 소중함을 또 한 번 뉘우치게 해주는 3년이었다. 잃은 것이 있다면 반드시 그에 반하는 얻는 것도 있다. 잃은 것에만 집중하다 보면 내가 얻은 걸 알지 못해 깨달을 수 없고 내가 얻은 것만 생각한다면 당연히 잃은 것에 대한 죄책감도 없을 것이다. 무슨 일이 생겼다고 일비일희할 필요 없다. 그저 오늘 하루 잘 버텨왔고 하루의 끝에 있을 때 자기 자신에게 잘 이겨냈고 버텨왔으니 고맙다고 한 마디 해주는 게 중요하다.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버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