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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Oct 06. 2016

페미니즘 흉내 내기

위근우-양영순 북토크 <SF 만화, 인간과 우주의 이야기> 다녀오다

좋아하는 기자 위근우, 좋아하는 작가 양영순이 제일 좋아하는 작품 <덴마>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어찌 안 갈 수 있을까. 그래서 갔다왔다. 서울와우북페스티벌에서 개최한 북토크 "SF 만화, 인간과 우주의 이야기"에. 과학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고 갔는데, 그냥 작품 <덴마>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실망하진 않았다. 도리어 더 좋았다.


너무나 재밌었던 여러 이야기가 있었지만 모두 생략하고. 중간에 페미니즘 이야기가 나왔다. 최근 덴마에 전투형 여성 캐릭터가 잇따라 나오고, 채색 담당하는 홍승희씨가 티셔츠를 인증한 바 있어서다. 사회자가 위근우라 정말 행운이었다. 페미니즘 이야기가 나오자 장내가 약간 싸해졌지만, 위근우는 양영순이 적절하게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도록 잘 유도했다.


양영순이 페미니즘을 인지하게 된 계기는 크게 두 가지라고 했다. 처음에는 작중에 여성 캐릭터가 죽는 장면이었다. 무수한 캐릭터가 죽어나가는 만화이지만, 이 장면에서 죽음의 의도는 여성 캐릭터의 남성 애인이 복수를 결심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여성이 수단으로 소모된 것이다. 이 장면을 그려 채색을 담당하는 홍승희씨에게 넘겼더니, 요즘은 이런 연출이 문제적이라는 지적이 돌아왔다고. 단번에 이해하진 못했지만 어쨌거나 그런 문제의식을 처음 갖게 되면서 머리 속이 혼란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 후배 여성 작가를 만나 얘기나눴을 때 이 얘기를 꺼냈더니, 여성과 남성이 올 자리에 '사람'을 넣어보라는 제안을 들었단다. 그러자 머리 속이 뭔가 명료해졌다고.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기 만화에서 여성을 다루는 방식을 굉장히 조심하게 됐고, 세계관 최강의 캐릭터를 여성으로 설정하는 등 나름의 노력도 하고 있지만, 이건 다 "흉내 내기"라고. 자긴 아직도 온전히 페미니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냥 간신히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라고. 그 말이 정말 좋았다. 그렇지 않은가. 일단 흉내라도 내면 되는 것 아닌가. 그 다음에 차차 이해하고 체화하면 되는 것이다. 양영순은 이런 말도 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가) 생존의 문제처럼 느껴진다고. "그걸 이해하지 않으면 작가로서 생명이 위협받을 것 같다"고.


이렇게 세상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아색기가>를 그리던 양영순이 페미니즘을 인지하고 그것을 "흉내"내기 시작했듯이. 이제 막 첫 걸음을 떼는 모든 이들의 옆에 홍승희씨와 위근우기자 같은 '데미안'들이 있기를 희망할 뿐이다. 혹은 내가, 또는 당신이 '데미안'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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