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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Jan 15. 2019

노예의 반란

영화 <국가의 탄생> 리뷰

  <국가의 탄생(2016)>, 네이버 시리즈. 선댄스영화제 수상작. 100년 전인 1915년에 개봉했던 영화와 제목이 같다. 1915년 영화를 보지는 못했는데, 찾아보니 남북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인종차별과 노예제를 극도로 미화해서 문제가 된 영화라고 한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당시 기준으론 무지하게 혁신적인 영화라서 영화사의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과감하게 넘겨짚자면, <국가의 탄생(1915)>이 남북전쟁기 백인들의 갈등과 화해의 결과로 (우리-백인-의) 국가가 탄생했다고 주장한다면, <국가의 탄생(2016)>은 노예였던 흑인들의 노동과 백인들의 폭압 위에 (너희-백인-의) 국가가 탄생했다고 뒤집는 영화다. 첨부한 포스터가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붉은색으로 뒤덮인 흑인 노예들이 성조기의 붉은 선을 이루는 모양. 아래로 스포일러 포함.



영화는 1830년대 흑인 노예 '냇 터너'가 다른 노예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던 실화를 소재로 삼았다. 냇 터너는 백인 목화농장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라는데, 어려서부터 거의 유일하게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재능을 보인다. 그렇게 영특한 냇 터너를 기특하게 여긴 백인 노예주의 아내는 성경을 가르쳐주고 냇 터너는 뛰어난 재능을 보이지만, 곧 목화농장에 투입되면서 더 이상 공부를 하지 못하게 된다.


장성한 냇 터너는 노예주의 신임을 받으며 일한다. 자신의 주인은 괜찮은 사람이라며 충성을 다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는 목장 안에서 다른 흑인 노예들을 모아 매주 기도회를 열고 설교를 할 만큼 성경에 통달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역 곳곳에서 노예들이 백인을 공격하는 일이 이어진다. 노예주들은 노예들을 잠재우려면 그들에게 '주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같은 흑인 중에서도 설교를 할 수 있는 냇 터너에게 순회 설교를 요청한다.


이를 계기로 냇 터너는 '비교적 괜찮은' 주인의 목장을 벗어나 악독하고 폭력적인 다른 목장의 노예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그가 배워온 성경, 주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씀들에 의문을 품는다. 이것이 정말 옳은가. 그리고 모종의 사건으로 다른 노예주와 말싸움을 벌이게 되고, 그 결과로 학대를 당한 끝에 그는 반란을 선동하게 된다. 이 말싸움 장면이 무척 흥미롭다. 말을 듣지 않는 냇 터너에게 노예주는 복종의 의미를 담은 성경 구절을 읊는다. 그러자 냇 터너는 노예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자유의 의미를 담은 성경 구절을 읊는다. 그렇게 몇 차례 서로 다른 성경 구절을 읊으며 목소리를 높이다가 결국 냇 터너가 주인에게 끌려 나간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성경 뒤집기, 혹은 전유하기. 같은 텍스트를 두고도 백인들은 흑인들의 복종을 위한 구절들만 가르쳤고, 더 많은 걸 읽을 수 있었던 냇 터너는 성경에서 자유를 위한 구절들을 찾아냈다. 냇 터너는 동료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속박을 뒷받침하려고 사용하는 구절들마다 자유를 허락하라는 구절들이 있고, 우리의 박해를 정당화하려고 사용하는 구절들마다 지옥에 떨어질 짓이라는 구절들이 존재해."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를 우리는 어떻게 믿는가.


몇몇 흥미로운 장면들 중 내 관점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반란을 시작한 첫 날의 저녁에 둘러모인 노예들의 대화 장면이다. 이들은 원래 같으면 이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어야 했는지에 대해 웃으며 떠든다. 목화를 두 박스째 담고 있었을 즈음이다, 주인을 위한 목욕물을 받아놔야 했을 때다,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다... 모두 일상을 지속시키는 노동들에 관한 내용이다. '국가의 탄생'은 이들의 노동 위에서 가능했다는 얘기다.


결국 반란은 실패한다. 처음에는 노예주들이 직접 진압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곧 정부에 속한 군인들이 나타나 반란을 진압한다. 함께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은 화형을 당하거나 교수형에 당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냇 터너는 도주한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냇 터너가 끝내 백인들 앞에 나타났을 때 분노한 백인들은 집단린치를 가하려 하지만, 그때 군인들이 나타나 저지한다. 폭력을 말린 게 아니다. 이 자는 학살을 저지른 자이기 때문에 (때려 죽여선 안 되고)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의 탄생. 권위의 상징화. 막스 베버의 국가에 대한 유명한 정의가 떠오르는 장면.


마지막 장면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냇 터너의 교수형을 분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던 아이가 청년으로 자라 남북전쟁에 참전해 카메라를 향해 총을 쏘면서 영화가 끝난다. <국가의 탄생(1915)>이 남북전쟁을 백인들'끼리' 갈등한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국가의 탄생(2016)>은 그 전쟁에서 피를 흘린 것은 너희만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를 통해 그 흑인을 바라보는 것이 같은 흑인이라면 먹먹한 서글픔을, 백인이라면 아찔한 두려움을 느껴야 할 거다.


정말 훌륭한 영화였지만,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영화의 감독이자 주연배우인 네이트 파커가 대학생 시절 한 여성을 강간했다가 고소당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알게 됐다. 무혐의로 결론지어졌다고 하지만, 성폭력 문제에 있어서 법의 잣대란 그렇게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아닐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여성은 우울증에 시달리다 2012년 경 자살했다는 사실도 영화 개봉 이후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국가의 탄생(1915)>이 영화사의 새 장을 열었음에도 인종차별 서사로 평가되어야 하듯이, <국가의 탄생(2016)>을 만든 네이트 파커 또한 그 훌륭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이 사안으로 평가되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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