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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Jan 20. 2019

2011년 아프가니스탄의 소녀

애니메이션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리뷰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 넷플릭스. 캐나다의 페미니스트이자 반전운동가이자 작가인 데보라 엘리스의 원작을 바탕으로 안젤리나 졸리가 제작했다. 이 애니메이션의 시대적 배경은 2011년, 공간적 배경은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이다. 미군이 침공한 후로 8년여가 흘렀고, 극단적 이슬람주의자인 탈레반이 다시 주도권을 잡은 무렵의 아프간. 상공에는 상시로 전투기가 날아다니고, 도시 한쪽에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탱크들의 무덤이 있다. 거리에서 여성들은 찾아볼 수 없으며, 모자를 쓴 남성들이 일종의 이슬람 경찰 역할을 하고 있다. 

11살 소녀 파르바나는 바로 이 도시에서 살아간다. 아버지는 다리 하나가 없는 장애인이고, 어머니와 장성한 언니, 그리고 아직 말도 못 배운 남동생 하나와 함께 산다. 바로 여기에 파르바나가 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여성임이 식별되는 자들-어머니와 언니는 이슬람 극단주의 사회에서 '인간'으로 인정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부르카를 쓰고 성인 남성과 동행해야만 거리로 나올 수 있다. 그게 율법이란다.

(남성들은 거리에서 혼자 다니는 여성을 발견하면 채찍질을 하며 쫓아낸다. 그들이 율법에 그렇게나 충실해서일까? 글쎄. 적어도 이 애니메이션이 은연중에 묘사하는 바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력이 쥐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집안의 경제주체는 (아직 덜 자란) 파르바나와 아버지가 된다. 극 초반은 파르바나와 아버지가 카불 시장에서 좌판을 깔아놓고 온갖 상품을 팔거나 '글 읽거나 써주기' 서비스를 홍보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맞다. 글 읽거나 써주기. (아프가니스탄은 문맹률이 정말 높은 나라다.) 아버지는 여자아이인 파르바나에게 글을 가르칠 만큼 상대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이다. 

그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 사람이기도 하다. 여기서 이야기라 함은 천일야화를 떠올리면 된다. 옛날옛적 이야기, 신화 이야기, 역사 이야기 같은 걸 말로 들려주는 것. 아버지는 이 '이야기꾼'의 속성이 자기 민족의 중요한 긍지 중 하나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파르바나에게 글을 가르쳐주었고, 이야기를 가르쳐주었다. 그가 가르쳐준 이야기에는 비교적 최근의 역사도 있다. 여성들도 대학에 다니면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시대의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극단주의의 시대에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견제의 대상이 된다. 어느날 아버지가 탈레반 추종자들에게 붙잡혀 교도소로 끌려가는 것이 <파르바나>의 첫 번째 사건이다. 자, 이제 이 집안에 성인 남성은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비교적 작고 눈에 안 띄는 파르바나가 시장에도 가보고 우물에 물 뜨러도 가보지만, 11살이어도 '긴 머리'를 가진 여성임은 금세 식별되어 곳곳에서 얻어맞고 수확 없이 집으로 쫓겨오는 일이 반복된다. 그 사이 집안의 음식들은 다 떨어져 가고, 파르바나가 들려주는 이야기만이 집 안의 온기를 유지한다.

결국 파르바나가 결단을 내린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남자 복장을 하는 것, 즉 남장이다. 머리를 자르는 장면이 흥미로운데, 그리 개의치 않는 듯한 파르바나가 처음 머리를 자르다가, 슬프고 처연한 눈빛의 언니가 이어받아 마저 잘라준다. 이제 남자가 된 파르바나는 거리를 걸어다녀도 누구에게도 제지당하지 않는다. 어제까진 경멸의 눈빛으로 쳐다보던 사람들이, 이제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장난을 걸어온다. 단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남자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 간단한 발상 하나가 종교적 극단주의의 허상을 폭로한다.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여성처럼 보여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율법이란 얼마나 우습고 헐거운가.

이제 자유의 몸이 된 파르바나는 그 동안은 볼 수 없었던 거리의 풍경들을 목격하게 된다. 이미 앞서 남장을 하고 거리에서 장사하는 학교 친구를 만나기도 한다. 파르바나는 이때 남자 이름을 하나 만드는데, 우리말로 '불'이라는 뜻의 이름을 고른다. 친구가 "이름 되게 재밌다. 이름인데 이름 같지가 않아!"라고 웃자 "나랑 비슷하네" 하고 답하는 파르바나의 말이 이 애니메이션의 주제의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애니메이션은 '이슬람 극단주의 사회의 여성'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2011년 아프가니스탄'도 입체적으로 담아낸다. 하루는 좌판에서 '글 읽거나 써주기'를 홍보하고 있으니 한 남자가 와서 편지를 읽어달라 청한다. 이 편지에는 그 남자의 여자친구가 전쟁통에 사망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울면서 자리를 떠난다. 그러고 보면 파르바나가 입은 남자 옷은 원래 그의 오빠였던 슐레이만이 입었던 옷이다. 슐레이만은 어딨냐고? 죽었다. 지뢰밭에서 놀다가.

극의 주된 서사구조는 파르바나가 교도소에 갇힌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을 번다, 이 부분도 2011년 아프간의 상황을 충실히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법제도가 무의미해지고 율법이 통치하는 사회, 하지만 율법보다도 '뇌물'이 우선될 수 있는 사회. 기존 권력의 해체 이후 여전히 다잡아지지 못한 채 혼란스러운 아프간의 상황을 <파르바나>는 이렇게 묘사한다.

결말이 아름다우면서도 슬프다. 스포일러가 중요한 작품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보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더 언급하진 않겠다. 캐나다인의 원작과 미국인의 제작이라 그런지, 작중에서 미국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작품의 윤리에 대해 딴지를 걸자면 이 부분 정도일까. 일하면서 틈틈이 쓰느라 엉성한 리뷰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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