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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Oct 07. 2016

10월 7일 읽은 것들

김혜수의 번역가 (아시아경제, 이윤주 칼럼니스트)


그런데 또, 열심히 눈치만 본다고 되는 건 아니다. 생의 어떤 불행의 요소가 눈치를 길러주는 건 맞지만 불행에 잠식당한 마음은 말귀를 방해한다. 자기연민에 갇힌 사람과 대화하기란 얼마나 지난한가. 자기를 연민하기란 또 얼마나 달콤한가. 말귀 밝은 이들은 그래서 자신의 불행이 세계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들은 보다 처절하고, 보다 참담한 타인의 세계를 넘어다본다. 이를테면 문학 같은 것을 통해.

한 사람이 온 세상의 비극을 겪을 수 없어서, 문학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훌륭한 문학은 독자를 자기연민의 우물 밖으로 꺼내준다. 제 손톱 밑 가시에 절절매며 살아온 사람에게, 이렇게 넓고 깊은 진창이 세상에 많으니 엄살은 조금만 떨라며. 말귀 밝은 이들이 개떡을 찰떡처럼 알아듣는 건, 말 한마디를 천 개의 결로 헤아리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보바리의 생과 조르바의 생을 함께 살면서 휘트먼의 생과 보들레르의 생도 건너본다. 그러고도 아직 못 살아본 생을 계속 궁금해한다. 궁금하니까 헤아리려 하고 자주 헤아리다 보니, 잘 헤아리게 된다.

그들은 비극을 알되 비극에 잡아먹히지 않는 사람들이다. 눈치를 능히 보지만 자신을 폐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점점 귀해진다. 오늘날 눈치 보는 태도는 그다지 미덕이 아니며, 자기 비극만 막대한 사람은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비극을 딛고 당당해지라는 자기계발서는 호황이고 생의 명암을 시퍼렇게 비추는 문학은 불황인 걸까, 그래서."




가난해서 죄송합니다 (한국일보, 박선영 기자)


"어느덧 가난은 드러내면 무례한 것, ‘댁에게 이런 꼴을 보게 해 몹시도 송구한’ 바바리맨 같은 그 무엇이 되었고, 사람들은 가난을 숨기기 위해 유행이라는 시대의 헌법을 따른다. 대개가 가난한데 아무도 가난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야 하는 시대. 청년들은 가난하다면서 왜 고가의 스마트폰을 사고, 패스트 패션을 사 입으며, 유명 맛집의 음식 사진을 소셜 미디어에 올리는가. 가난-바깥으로의 탈주에 성공한 기성세대가 가난을 혐오하고 경멸하며, 그런 더러운 태도와 정신을 세상에 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내게서 가난의 냄새가 난다면 여러분은 몹시 불편하실 테지요. 구질구질하게 가난 얘기 같은 것은 듣고 싶지 않잖아요?’ 이렇게 따져 묻는 청년 앞에서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미당의 시를 나는 인용할 수 없다."




두 소녀가 성인 여성을 '재미로' 죽였다 (시사인, 김세정 변호사)


앤절라 라이트슨의 죽음은 살인자가 어린 소녀들이라는 점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다. 게다가 저 잔혹성과 그 와중에 셀피를 찍는 행태 역시 기성세대를 놀라게 했다. 사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저 흔한 살인 사건 중 하나처럼 보였을 것이다. 혼자 사는 추레한 알코올중독 여성. 희생자가 되기로 예정된 자의 죽음. 그러나 한편 살인자들은 이미 피해자와 사뭇 닮아 보인다. 그 모습은 그들이 속한 계층에서 나이 들어가는 모습의 한 전형이기도 하다. 벗어날 수 없는 매우 좋지 않은 루프(loop)가 거의 닫혀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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