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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Feb 23. 2019

좀비가 아니라 재난이다

드라마 <킹덤> 리뷰


<킹덤> 시즌1, 넷플릭스. 정말 재밌다. 모처럼 탁월한 재난 장르. 왜 좀비물이 아니라 재난물인가. 이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좀비는 일반적인 좀비물에서의 활용과 달리 "역병"의 의인화된 모습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고 생각해서다. 즉 <킹덤>은 전염병 재난이 발생한 조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다. 일반적인 좀비물도 재난상황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보통은 파멸되는 과정을 다룬 아포칼립스거나 또는 파멸 이후를 다룬 디스토피아 장르라고 보는 편이 좀 더 적확할 것 같다. 아포칼립스와 디스토피아는 생존에 방점이 꽂히지만, 재난은 대체로 극복에 방점이 꽂힌다. 

아래로 스포일러 뿜뿜.

외국의 재난 장르와 달리 한국의, 특히 2014년 이후 한국의 재난 장르는 필히 세월호 참사의 은유일 수밖에 없다. <킹덤> 역시 여러 지점에서 그렇다. 감독을 맡은 김성훈이 역시 세월호 이후의 재난 영화인 <터널>의 감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일관된 작품세계다. 세월호 참사의 은유란 무엇인가. '위'의 탐욕으로 재난이 만들어지지만, 그 피해는 아무런 보호막이 없는 '아래'에서 당하는 것이다. 조금 더 윤리적으로 나아가면, 침묵과 방조로 그 상황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는 '중간'을 폭로하는 것이다. (역시 좀비-재난 장르인 <부산행>은 이 지점을 가장 메타적인 방식으로 폭로했다고 본다.)

<킹덤> 시즌1은 '중간'보다는 '위'를 고발하는 쪽에 포커스를 뒀다. '중간'을 폭로하는 지점은 몇몇 장면에서 다소 흐릿하게 그려지는데, 이는 '양반'과 '천것'으로 분류되는 조선 사회의 특징 상 '중간'이라 할 만한 계급이 없기 때문일 듯하다. 시즌2에서 어떻게 나아갈지가 궁금하다. 내 생각에는 한양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세자의 세력을 다른 지역 '천민'들이 가로막는 과정에서 이 지점을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과연 어떨지는 두고 볼 일이다.

아무튼, 세월호 이후로 재난을 다룬 여러 콘텐츠들이 등장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킹덤>은 그것들 중에 가장 뛰어나다고 느껴진다. 그 지점은 명백히 정치 스릴러라는 장르의 결합에 있다. 정치 장르에서 가장 짜릿한 설정, 유배된 자가 주변부에서 성장하며 인정받고, 조금씩 힘을 모아 다시 중앙을 탈환한다는 설정을 <킹덤>은 세자를 통해 구현해낸다. (<초한지>와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여기서 재난 상황은 세자의 정치적 성장을 촉발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다시 말해 재난 장르의 한 서사인 '극복하기'의 방법론으로 <킹덤>은 '좋은 리더'를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이건 현대 정치물로 구현하면 좀 촌스러운 이야기(<댄싱퀸>이라든지, <지정생존자>라든지)가 되기 쉬운데, 조선시대의 세자라는 설정은 이 촌스러움을 무마시키는 좋은 설정이다. 자기의 안위를 제일 우선으로 걱정하는 관리들과 달리, 왕족의 핏줄을 타고난 세자가 백성의 안위를 우선으로 걱정한다는 것은 그리 비현실적인 상상은 아니니까. 정치학적 관점에서 이 지점은 왕국이 공화국에 대비해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다. '진정성'을 구현하기 위해 쓸데없이 감상적인 에피소드를 끼얹을 필요가 없다는 것.

한편으론 민중혁명의 서사가 될 수도 있다. 시즌2에서 어떤 내용이 전개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동래에서 시작된 좀비 행렬이 점점 북상할 텐데, 그 과정에서 남쪽의 민초들도 좀비를 피해 "살아남기 위해" 점점 북상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을 규합해 해원 조씨 천하를 "전복하기 위해" 북상하는 세자의 복심이 더해지면 몹시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꼭 한 번 보고 싶은 이야기다. 

이렇듯 내가 보기엔 좀비보다는 그로 인해 촉발되는 정치에 방점을 찍은 드라마인데, 그러면서도 김은희 작가는 좀비 장르의 오래된 문법들에 매우 충실함으로써 좀비 마니아들까지 만족시킨다. 좀비 장르의 오래된 문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계관의 좀비는 다른 세계관의 좀비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를 밝혀내는 짜릿하고 복잡한 과정이다. 시즌1의 엔딩에서 나온 반전은 이 문법을 아주 완벽하게 구사하면서 이야기의 재미를 돋군다. 

스토리만 화려하고 영상이 촌스러우면 결과적으로 촌스러워지는데 <킹덤>은 영상도 너무 아름답다. "이것이 바로 조선 감성이다"를 어필하려고 작정한 연출진과 촬영진의 각오가 너무 잘 보인다. 좀비가 활동을 멈추는 동 트는 시간의 풍경들은 그야말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서구의 오래된 시각에 대한 응답이랄까. 좀비와 싸움을 벌이는 여러 장면들도 정말 탁월하다. <맥베스>(2015년작)가 떠오르는 영상들. 안개와 연막과 화염이 구체적인 배경을 날려버리고 절대적인 고독함과 위급함만 남겨버리는 연출들.

+
6화에서 한 장면이 유독 눈에 밟힌다. 닫힌 성문 앞에서 들여보내 달라고 울부짖던 피난민들. 그야말로 난민의 은유, 아니 직유인 셈인데, 결국 세자가 통치권을 잡고 난민들을 들인다. 이때 배고프고 지친 난민들이 성문으로 뛰어들어오는 장면이 꽤 구체적으로 잡힌다. 놀랍게도 좀비처럼 눈이 풀리고 팔을 이리저리 흔드는 모습이다. 처음엔 좀 불쾌한 장면이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여기에 의도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모두가 비참한 시대에 우리가 가짜 난민과 진짜 난민을 무슨 수로 구분하겠냐는 것 아닐까. 하여간에, <킹덤>은 난민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점.

+
배두나와 김혜준의 연기가 부족하게 느껴진다는 말들엔 잘 동의가 안 된다. 나는 여러모로 캐릭터 해석에 충실한 연기처럼 느껴졌단 말이지. 배두나가 연기한 '서비'는 그가 왜 세자의 여정에 동참하게 되었는지, 왜 메인 조연급으로 등장해야 하는지 그 배경이 아직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캐릭터다. 지금까지는 이 서비라는 캐릭터가 왜 이렇게 만사에 초연하고 별로 당황하지 않는지 그 과거가 매우 궁금하다. 나는 배두나가 의도적으로 이런 연기를 했다고 보는 편. 김혜준이 연기한 중전은 뭐랄까, 아버지의 꼭두각시로 이용당하는 수동적 상황에 대한 환멸감과 스스로 권력의 중심이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적절하게 표현됐다고 생각한다. 역시 이 캐릭터의 배경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연기력 논란은 아직 좀 이르지 않은가, 뭐 그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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