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버드나무 Mar 10. 2019

끝내주게 시크하고 쿨한 여성 영웅

영화 <캡틴마블> 리뷰

<캡틴마블>, 메가박스 백석. 디즈니의 꾸준히 반복되는 테마. 그들이 엎질러놓은(?) '여성성'의 덫을 해체하고 지워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하는 것이 애잔하고 기특하다. 또한 최근 헐리우드 영화에서 꾸준히 반복되는 이미지. 위대한 일을 해내는 (성인)여성과, 그의 뒷모습을 존경스럽게 바라보는 소녀의 구도는 <캡틴마블>에서도 여지없이 재현된다. 이제 이것 자체가 하나의 클리셰처럼 느껴질 정도이지만, 아무렴 어떠랴. 이 메시지가 여전히 사회적으로 필요하다면, 더 이상 필요없어질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되어도 좋다.

러.



1.
하지만 나는 역시 "Can do anything"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타고난 재능을 갖춘 주인공이나 뭔가 우연한 계기로 초인적인 능력을 얻게 된 주인공을 내세우는 것이 꾸준히 동의가 되질 않는다. (물론 가장 끔찍한 형태는 '혈통'이다. <블랙팬서>와 <아쿠아맨> 얘기임.) 이건 뭐랄까, 이세돌이 알파고를 이겼다고 해서 그게 '인간의 승리'가 아닌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다만 이런 메시지가 제작진의 의도가 아니라고 상정하게 된다면 <캡틴마블>은 끝내주게 시크하고 쿨한 여성 영웅 이야기다. 브리 라슨이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는 그 톤이 정말 맘에 들었다. 개봉 전 스탠리의 추모와 관련한 무슨 논란도 브리 라슨이 영리하게 캐릭터성을 발휘한 것이었다는 느낌. (사실 이건 영화 보기 전부터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 영화를 본 남성들이 '메갈영화는 아니다'라고 평을 내렸다는 이야기를 봤다. 정말 우스운 얘긴데, 그러니까 이들은 메갈리아 당시의 페미니스트들이 무슨 주장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볼 생각조차 안 했다는 거다. 그런 주제에 자기들 머릿속에서 멋대로 상상해낸 페미니스트들을 비난한 거라는 확신이 든다. 그때 페미니스트들은 정확히 <캡틴마블>의 이야기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때의 그것은 '메갈'이고 <캡틴마블>은 '메갈아님'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냥 '마블 못 버려 엉엉' 이상 이하도 아니랍니다.


아무튼 대자본-블록버스터-대중 영화로서 (제한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최대치의 페미니즘을 <캡틴마블>은 뺄 것도 더 넣을 것도 없이 선명하게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정말로 선명(투명?)하기 때문에 더 말할 껀덕지는 없을 것 같다.


2.
페미니즘과 함께 영화의 한 축을 잡은 주제는 난민 이슈인 것 같다. 사실 <캡틴마블>이 난민 이슈를 다뤘다는 얘기를 미리 알고 갔기 때문에 간신히 의식한 거지, 막상 중후반부까지도 난민이라는 주제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즉 '소재'로서 난민이지, '주제'로서 난민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그렇다면 <캡틴마블>을 난민을 다룬 콘텐츠로 파악하고 그것에 대해 비평하는 것은 조금 과도한 액션 아닌가, 라고 생각을 정리하던 차에 영화는 메시지를 던진다. "너희가 살 수 있는 안전한 집을 지구 바깥에서 찾아줄게." 아, 예...


내가 직접 본 영화는 아니지만, 최근 개봉했던 <드래곤 길들이기 3>도 비슷한 메시지를 던졌다고 한다. 지금 당장은 우리와 살 수 없으니 평화가 찾아올 때까지만 바깥에서 지내달라, 뭐 그런 메시지라고 들었다. <캡틴마블>이 난민에 대해 던지는 메시지는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게 느껴진다. 이것이 트럼프 시대를 맞은 리버럴의 난민에 대한 정치적 결론인 걸까? "우리는 너희를 정말 받고 싶지만, 사람들은 너희를 싫어하고, 너희를 받자는 우리를 싫어하게 될 거고, 그러면 우리는 트럼프를 몰아낼 수 없게 될 거야. 그러니까 일단 너희를 받는 건 '나중에' 할게, 조금만 참아줘, 우리가 너희 아끼는 거 알지?"


3.
사소한 이야기들. 


1) 스탠리의 생전 모습으로 장식한 오프닝 크레딧에서 내적 울음을 삼켰다. 이런 트리뷰트를 사랑한다. 


2) 번역이슈. 오역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이상한 번역들은 좀 보였다. 초반에 닉 퓨리가 비어스를 부를 때 "-(까먹음ㅠ) Lady", "블록버스터 걸"이라는 대사들이 있는데, 분명히 성차별적 맥락을 보여주는 의도적 대사임에도 번역가는 단순하게 '요원', '그 여자' 정도로 번역을 해뒀다. 그 대사가 '성차별적'이라고 느껴서 순화를 한 걸까.


3) 미 공군의 소속감을 강조하면서 슈트 색상을 미국적인 색으로 바꾼 것이 '제국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있는 듯하다. 그렇게 볼 여지도 물론 있을 테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캐롤이 공군에 지원한 건 어떤 애국심이 아니라 단지 하늘을 날고 싶다는 마음에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중후반부 비행기 없이도 하늘을 날 수 있게 됐을 때 '우후~' 소리 내며 신나한다. 이렇게 볼 때 캐롤에게 미 공군은 단지 '하늘을 날 수 있게 해줄 오랜 선망의 대상'이고, '그 꿈을 자신의 능력으로 성취한 여성'을 강조하기 위해 미 공군이 동원된 것이라 느꼈다.


4.

자고 일어나도 남자들이 이게 왜 '메갈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궁금해서 궁리. 


- 영화가 다루는 '차별'의 시대가 이미 흘러간 시대, 80년대 중후반과 90년대 초중반이라는 점. 안티페미들은 "여성 차별은 옛말이고 지금은 우리가 차별받는다"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데, 이런 이들에게 8~90년대의 성차별 묘사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며, 오히려 지금 자기들의 피해의식을 강화하는 것일 수도 있음.

- 누가 말하느냐의 차이. 당연하게도 <캡틴마블>에서 성차별을 말하는 건 캡틴마블이 아니라 <캡틴마블>을 만든 제작진이다. 즉 구체적인 인격이 아닌 추상적인 자본-기업이라는 점에서 '이해관계 없이 진정성을 가진' 스피커라고 인지된다는 점.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은 모두 얼굴과 이름이 있는 각각의 여성들이며, 그 남자들은 이들을 용납하지 못한다.

- 누구한테 말하느냐의 차이. 지금 여기에서 성차별을 지적하는 말의 직접적인 청자는 자기 자신들이다. 더불어 자기들이 가진 것을 내려놔야 하는 문제다. <캡틴마블>은, 물론 남자들에게 말하는 의도를 깔고 있지만, 그보다는 범세계적으로 추상적인 오디언스를 상정하고 있으며, 남자들은 상대적으로 덜 기분이 나쁠 수 있다.

- 물론 이들은 단지 '메갈'이 뭔지를 전혀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매거진의 이전글 좀비가 아니라 재난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