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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Mar 08. 2019

종교와 안보

웨스트윙 시즌1 1화

웨스트윙의 기념비적인 파일럿 에피소드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각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 와중에도 주요한 이슈 두 가지가 함께 전개된다. 첫째로 쿠바에서 도망쳐 나와 통나무배를 타고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다 기상악화에 부닥친 쿠바인들에 대한 입장이고, 둘째로 조쉬 라이먼(비서실 차장)의 TV토론에서의 신성모독 발언으로 인한 종교계의 반발에 대한 입장이다. 이 두 가지 첨예한 이슈에 대해 현재 휴가로 부재중인 제드 바틀렛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스태프들이 난장을 벌이는 게 파일럿 에피소드의 주제다.    



1.

미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아마 ‘안보’가 아닐까. 안보가 안 중요한 나라가 어디 있겠냐마는, 미국에 있어 안보란 거의 신성한 무엇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러 미국 콘텐츠들을 보다보면 미국인들은 ‘독립 이후 본토는 언제나 안전했다*’는 역사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하와이 등 미국령은 제외다.) 9.11 테러 당시의 히스테릭한 반응을 떠올려봐도 본토에 대한 위협은 미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건 중 하나일 거다.  


* 정정 : 언제나는 아니라고 한다. 1812년 이후 언제나... 참고. 뭐랄까, 이 전쟁은 내게 독립선언 이후 '진정한 독립'의 한 과정으로 이해되어서 '독립 이후 언제나'라는 표현을 사용.


지정학적으로 미국은 제법 안전한 나라에 속한다. 이른바 ‘선진국’과 ‘분쟁국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유럽-중동과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21세기 가장 위협적인 국가일 중국과도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다. 양차 세계대전 와중에도 미국의 본토가 끝내 안전했던 건 이런 지리적 이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미국에게도 위협적인 존재는 있으니, 바로 라틴아메리카다. 발밑에 놓인, 예측불허의 대륙. 그래서 미국은 라틴아메리카를 “평화롭게” 관리하는 데 온 역량을 쏟아왔다.


어떻게 관리했냐면, 반미적인 지도자를 암살 시도하고, CIA를 파견해 친미 군부의 쿠데타를 획책하고, 친미 세력의 정치활동에 돈을 쏟아 붓는 식으로 했다. 이런 수작질 탓에 라틴아메리카는 늘 불안정했다. 옛날옛적 얘기도 아니고 지금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얘기다. (참고) 미국의 사주로 발생한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는 아무래도 칠레의 마르크스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를 끌어내린 피노체트의 쿠데타일 테고. 하지만 베네수엘라도, 칠레도, 이 나라에 비하면 미국에겐 별 위협도 아니다. 그게 쿠바다. 일찍이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블록을 형성하고 반미 기조를 명확히 세운 나라. 그래서 미국은 쿠바의 지도자인 피델 카스트로를 암살하려 수백 번 시도했다지.     


그런 쿠바에서 입국을 시도하는 난민들이기에, 아무리 리버럴 정부라고 해도 정치적 부담은 있다. 혹시 이들이 난민인 척 하는 테러리스트라면? 불법 밀입국자를 살리기 위해 자원을 써야 한다고? 살아서 도착하면 살려주되 굳이 살리러 갈 필요가 있어? 웨스트윙의 실리주의적인 관료들 몇몇은 이런 입장을 보이는 와중에, 조쉬 라이먼만 이렇게 비아냥거린다. “거기에 메이저리그 진출할 선수 하나만 있었어도 항공모함을 보냈겠죠.” 난민의 ‘가치’를 계산하는 위선적 리버럴들에 대한 통렬한 조롱. 아론 소킨은 이런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쓰는 탁월한 작가다. 에피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틀렛은 간단한 논리로 입장을 밝힌다. 더 낫게 살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통나무배에 의지해서 자신들의 나라로 찾아온 사람들을 죽게 놔둬선 안 된다는 것. 그렇다. 웨스트윙은 복잡한 문제를 맞이한 리버럴의 가장 ‘합리적으로 리버럴한 입장’을 대체역사의 차원에서 정립하는 목적의식이 있는 드라마다.     


2.

‘종교’ 또한 미국을 이해하는 데 빠질 수 없는 키워드다. 애초에 종교박해 때문에 세워진 나라이니까. (그런데 ‘종교박해’ 때문에 만들어진 나라치고는 ‘다른 종교’를 박해하는 것이 우습고 한심하지.) 대통령이 취임할 때 성경에 손을 올리고 취임선서를 할 정도다. 취임선서의 마지막 멘트는 이것. "So, help me, god." 그런 나라라서 조쉬 라이먼의 발언은 문제가 된다. (아, 물론 그렇게 세워지지도 않은 한국도 비슷한 이슈가 생기면 문제가 될 거다.) 아무튼, 이 이슈에 대한 부연은 더 필요없을 듯하고. 

    

이런 상황에서 비서실장 리오가 종교계 거두를 달래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에 이런 언급이 있다. 제드 바틀렛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낙태 반대 캠페인에 참여할 만큼 신실한 종교인(그는 가톨릭 신자다)이니 정부의 입장을 신뢰해달라는 것이다. 이건 정말 쇼킹한 이야긴데, 뒤에 따라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그건 그런데, 낙태에 대한 논의는 입법의 영역이고 제드 바틀렛은 (개인의 입장과 무관하게) 입법부의 판단을 따를 것이라는 얘기.


물론 진보적 입장에서 바틀렛의 낙태 반대 입장은 비판의 대상이지만, 그 뒤에 따라오는 정치적 입장은 행정과 입법의 임무를 명확히 구분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민주적 명분을 갖춘 입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하지만 명분의 차원에서만 그렇다. 입법부도 대통령의 처지와 비슷하게 구성돼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웨스트윙은 2000년대 초반에 방영된 드라마다) 사실상 임신중절 금지를 유지하겠다는 뜻이 된다. ‘사회적 합의’를 방패로 삼는 현 한국 대통령의 논리와 명분만 다를 뿐 입장은 같은 셈이다. 그래도 자신들의 입장은 숨긴 채 사회적 합의를 요구하면서도 그것을 이끌어내야 하는 정부의 의무를 외면하는 한국 정부의 방식보다는, 바틀렛의 방식이 조금 더 솔직하고 책임감 있는 방식이라 해야 할까. 뭐 어느 쪽이건, 바틀렛은 지금 시대에 대통령을 하고 있다면 그의 종교적 신념보다 시대의 흐름을 존중할 사람이라는 생각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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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럿 에피라 말이 길었고 담부턴 대충 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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